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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농촌소년의 순국 윤봉길

by 황금냥진콩 2025. 7. 17.

매헌 윤봉길
우리는 감사속에서 그를 기억해야한다.

 

윤봉길 (尹奉吉, 1908년 6월 21일~1932년 12월 19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현 예산군) 출생이다.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훙커우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가난한 농촌의 소년, 조국을 깨우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한 농가였고, 어린 시절부터 소작농으로 살면서 농사일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남다른 감성과 지성을 지닌 아이였다. 책을 좋아했고, 백범일지나 신문처럼 나라의 현실을 알 수 있는 글들을 어린 나이부터 탐독했다. 그는 스스로를 '시골 소년'이라고 불렀지만, 마음속엔 조국을 위한 불타는 열정이 있었다. 그는 조국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고는, 단순한 생존을 넘는 인생을 결심하게 된다.

10대 시절, 그는 독학으로 한글과 한자를 익히고, 심지어 신문을 돌리며 글을 쓰고 배웠다. 그는 종종 나무 위에 올라 마을 사람들에게 나라의 현실을 외쳤고, ‘의식 있는 소년’으로 불렸다. 1926년에는 자신의 철학을 담은 ‘농민독본’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농민이야말로 조국의 기둥이며, 교육과 단결로 스스로를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19살의 나이에 책을 집필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윤봉길은 이미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민족의 깨어 있는 청년이었다.

1930년,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 윤봉길은 상해로 망명한다. 조국을 떠나는 순간, 그는 가슴에 가족사진 한 장과 성경책, 그리고 조국의 국토를 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임시정부가 숨 쉬는 상해였다. 김구를 처음 만난 그날, 윤봉길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하고 싶습니다.” 김구는 그 눈빛 속에서 망설임 없는 결단을 보았고, 곧 그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청년의 결의는 조용하고 단단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역사에 남을 결행을 준비한다. 그날은 일본 천황의 생일이자 상해 사변의 승전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일본군 고위급 장성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병 안에 폭탄을 숨긴 채, 행사장에 들어섰다. 김구는 전날 밤, 떨리는 손으로 윤봉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다녀오게,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좋네.” 윤봉길은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 제 죽음이 조국을 살릴 수 있다면, 저는 이미 행복합니다.”

폭탄이 터진 순간, 공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와 제3함대 사령관 등 수많은 고위급 인사들이 중상 혹은 사망했고,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순간, 일본은 충격에 빠졌고, 조선과 중국의 항일투쟁은 다시 한번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의거는 국제 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장제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중국 10만 병사보다 윤봉길 한 사람의 용기가 더 큰 영향을 줬다.”

체포된 윤봉길은 일본으로 압송되어 군사재판을 받는다. 그는 재판 내내 단호했고, 자신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는 부모님과 두 아이에게 남긴 사랑과 함께, 조국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적혀 있었다. “부디 우리 아이들이 자유로운 조선에서 태어나길 바랍니다.” 이 한 줄의 기도는 윤봉길이 생을 다한 날까지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었다.

순국, 그리고 남겨진 울림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5일, 일본의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받는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일본 당국은 그의 순국 장면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가족은 물론 조선인에게조차 소식을 차단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리 없이 번져나갔다. 김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소식을 듣고,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이 한 사람의 죽음이 조국의 생명이 될 것이다.”

윤봉길의 순국 이후, 조선 내에서는 항일의지가 다시 타올랐다. 그의 의거는 일제의 ‘무적 신화’를 무너뜨렸고, 압박에 눌려 있던 많은 청년들에게 각성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임시정부는 그의 희생을 계기로 국제사회와의 연대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김구는 더욱 굳건한 신념으로 광복군 조직을 강화하게 된다. 윤봉길은 단순한 투사가 아닌, 독립운동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에 남겨져 있었다. 광복 이후에도 유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일본은 그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의 유해를 어렵게 찾아 조국으로 모셔온다. 예산 덕산, 그가 태어난 고향에 다시 안장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고 그의 넋을 기렸다. 장례식 날, 김구 선생은 그의 관을 끌어안고 말했다. “이제야 자네를 조국 품에 안겨줄 수 있게 되었네.”

그가 남긴 편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특히 그의 아들 윤종에게 보낸 유언은 시대를 넘어 울림을 준다. “너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그러나 복수하지 마라. 오직 나라를 사랑하라.” 이 말은 복수와 증오가 아닌, 나라 사랑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였다. 윤봉길은 비극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어린 두 아들은 그가 떠난 뒤 가족과 뿔뿔이 흩어졌고,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내 유효준 여사는 남편의 순국 이후 깊은 고통에 빠졌고, 정부나 단체의 도움 없이 외롭게 아이들을 키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고, 살아 있는 증인으로 조용히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하염없이 긴 고통 속에서도, 그 가족은 윤봉길이라는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1980년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윤봉길 기념관이 상해에 세워졌고, 그의 의거가 일어난 홍커우 공원은 현재 ‘루쉰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그 현장에는 조용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찾아가고, 그의 외침을 다시 떠올린다. “조국이여, 나의 피를 받아주소서.”

윤봉길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용기인가를 묻는다. 단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이 아니라, 가족을 두고 떠나는 마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길을 등지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한 사람. 그는 조용한 청년이었지만, 온 세계를 울린 울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윤봉길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그 이름에는 나라를 사랑한 청년의 눈물이, 정의를 향한 분노가, 미래를 위한 기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누군가의 피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윤봉길은 그렇게 물었다. “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나도 존재할 수 있는가?” 그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살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죽었다. 그의 짧은 삶은, 누구보다 길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