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가 되기까지...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by 황금냥진콩 2025. 8. 2.

1836년의 안데르센

 

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1805.4.2~1872.8.4)

덴마크의 작가  희곡, 소설, 여행기, 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다작하였으나 주로 동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이에게도 쉽고 성인독자들에게도 역경 속에서도 미덕과 회복에 대한 교훈을 제시한다. 많은 이야기가 발레 연극 애니메이션 및 실사 영화등으로 각색되어 왔다.
대표작으로는 벌거숭이임금님,빨간구두,성냥팔이소녀,미운오리새끼 인어공주, 엄지공주, 눈의 여왕, 등이 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 안데르센의 시작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2일, 덴마크의 오덴세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부로 일했다. 어린 시절의 안데르센은 항상 가난과 외로움 속에 살았다.

 

집에는 책이 거의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셰익스피어나 성경 구절을 읽어주며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동화 속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안데르센은 일찍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해야 했다.

 

어린 그는 방직공장과 담배 공장에서 일했으며, 거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안데르센은 마음속에 품은 ‘배우’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극장 무대에서 사람들을 웃기고 감동시키는 상상을 하며 현실을 견뎌냈다.

 

 

롤리헤드에서 안데르센: 이스라엘 멜시오르(1867년경)
롤리헤드에서 안데르센: 이스라엘 멜시오르(1867년경)

코펜하겐으로..

 

1819년, 그는 고작 14세의 나이에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단돈 몇 푼 만을 들고 떠난 여정이었다. 코펜하겐에서 안데르센은 극장을 찾아다녔고, 왕립극장에 문을 두드렸다. 그의 연기와 목소리는 특출 나지 않았지만, 극장 관계자들은 그 안에 특별한 감성이 있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6세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라틴어와 문학, 문법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학문은 그에게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고, 나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것도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특히 그를 지도하던 교사는 냉소적이었고, 그의 감성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의 외로움과 고통은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외된 존재’의 모습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860년 7월 프란츠 한프슈텡글이 그린 안데르센의 초상화
1860년 7월 프란츠 한프슈텡글이 그린 안데르센의 초상화

미운오리새끼 안데르센

안데르센은 시,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지만 초기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835년, 그의 첫 동화집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가 출간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야기인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 새끼」의 원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 동화들을 단순한 어린이용 오락물로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겪은 슬픔, 외로움, 열등감 등을 동화 속에 녹여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의 작품 속 ‘미운 오리 새끼’는 사실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놀림받으며 살았지만, 결국은 ‘백조’로 자라난다는 이 이야기는 안데르센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자화상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슬픔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꾸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작가였다.

 

그는 문학계에서도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덴마크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성공과 명성 속에서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고, 사랑은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났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사랑을 동화로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했다.

슬픔을 품은 이야기꾼, 영원한 백조가 되다

1835년에 출간된 『어린이를 위해 들려주는 동화』는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덧붙여지며, 그의 대표작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안데르센은 총 156편의 동화를 썼고, 그중에는 「벌거벗은 임금님」, 「눈의 여왕」, 「나이팅게일」 과 같은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재미있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동화 속에는 인간의 약함과 강함, 슬픔과 용기, 외로움과 희망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안데르센은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많은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찰스 디킨스,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등 당대의 대문호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 사이에서도 항상 자신을 ‘낯선 외톨이’로 여겼다. 디킨스의 집에 머물렀을 당시, 그의 행동과 말투가 어색하고 민감하여 불편을 느낀 디킨스 가족이 있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유쾌한 성격이라기보다 섬세하고 예민했으며, 그 때문에 종종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웠다.

 

그가 평생 마음에 품었던 여성도 있었다. 연극배우였던 제니 린드였다. 안데르센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친구로만 생각했다. 그는 이 짝사랑의 감정을 「나이팅게일」이라는 동화로 표현했다.

 

동화 속에서 나이팅게일은 황제의 병든 마음을 노래로 치유하지만, 결국 황제는 인형을 더 소중히 여기며 새를 멀리한다. 이 이야기 속 새는 바로 안데르센 자신이었다.

 

성공 이후 안데르센은 덴마크 국왕에게서 훈장을 받았고, 국가의 자랑으로 여겨졌다. 그는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그의 생일에는 덴마크 전역에서 축제가 열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 명성 속에서도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어린 시절’을 결코 잊지 않았다.

 

늘 수첩에 다음 동화 아이디어를 적었고, 누군가에게 받은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두었다. 그는 감정에 민감했고, 세상의 모든 슬픔에 귀 기울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까지 글을 놓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된 이후에도 작은 글씨로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1875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끊임없이 편지와 일기를 남겼고,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에게 따뜻한 위로를 남겼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을 치를 정도로 성대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아이들은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읽고 자란다. 그의 이름을 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은 세계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릴 만큼 권위를 갖는다. 그의 삶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들은 가장 빛나는 별처럼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다.

 

‘미운 오리 새끼’였던 그는 결국 자신이 진정한 백조였음을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우리 곁을 떠났지만, 수많은 아이들이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외롭지 않게 자라나게 만들었다. 고독했던 삶이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안데르센이라는 사람이 남긴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