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잊으면 안 되는 역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 소중한 우리의 유산 광개토대왕릉비는 지금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다고 한다
필자 역시 실제로 보지 못하였고 솔직히 한자가 많아 무슨 뜻인지 실제로 보아도 모를 것이다.
다행히 비문해석이 네이버 나무위키에 있었다.
우리가 당장 필요한 정보는 아닐수있어도 살아가면서 알아야 지킬 수 있는 유산이기에
여기에 가지고왔다.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다.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순행하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께서 나룻가에서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우라."라고 하셨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이) 세속의 왕위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였다.
17 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영락(永樂) 5년(395년)[24] 을미에 왕은 패려(稗麗)가 사람들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27] 가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700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 말과 양 떼의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어가를 돌려 양평(襄平)으로 가는 길을 지나, 동쪽으로 후성(候城), 역성(力城), 북풍(北豊)[28], 오비해(五備海)를 지나며 영토를 시찰하고 사냥을 한 뒤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 잔과 ▨▨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 잔 국을 토벌하셨다. 우리 군이 (3자 불명)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성,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句牟城), 고 모야라 성(古模耶羅城), 막▨▨▨▨성(莫▨▨▨▨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31], 농매성(農賣城),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 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미성(味城), ▨▨▨▨▨▨▨리성,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증발성(曾拔城), 유▨노성(儒▨盧城), 구천성(仇天城), ▨▨▨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 잔(百殘)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웠다. 왕이 위엄을 갖추고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예병을 보내 그 수도를 압박하였다.... 중심을 공격하고...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란하고 급박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 꿇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구히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이전에 미혹에 빠져 저지른 허물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이후 순종해 온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大臣)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에 교를 내려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해 식신(息愼)의 땅과 계곡을 살펴보게 하셨다. 이때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라성(莫▨羅城), 가태라 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식신은 고구려에) 조공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했다.
영락 9년(399년) 기해에 백 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平穰)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해자를 부수었습니다. 노객(奴客)은 (대왕의) 민(民)으로서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리게 했다.
10년(40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38]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69개의 성을 모두 지키고...(이하 내용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나랏일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복구(僕句)... 조공하였다. [39]
14년(40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요해처를 끊고 (적을) 소탕하니, 왜구(倭寇)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17년(407년) 정미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고 참살해 모두 소탕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1만여 벌이며, 군수물자와 병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住城), ▨城▨▨▨▨那▨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 동부여(東扶餘)는 예로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군대를 돌렸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로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격하여 깨뜨린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개였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호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民)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련(訾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 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계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43]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해 온 한(韓)과 예(穢)(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도(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 모야라 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 잔 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 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오직 멀고 가까운 지역에 사는 구민(舊民)[44]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한 일은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소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연호(烟戶)들이 어긋나고 섞이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