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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잃은 김창수에서 백범까기... 김구

by 황금냥진콩 2025. 7. 17.

백범 김구
진정한 나라사랑 김구

 

나라 잃은 청년, 김창수에서 김구로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창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의협심이 강한 아이였으며, 유교 경전을 익히며 바른 뜻을 품고 자랐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1895년, 단 한 사건으로 크게 전환되었다.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된 일제 침략에 분노하여, 일본인 장교를 처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창수는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형수’로 살아야 했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무 살이었다. 젊은 청년에게 사형이라는 현실은 잔혹했다. 하지만 김창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오히려 민족과 정의에 대한 뜻을 더욱 확고히 하며, 단식 투쟁과 의연한 태도로 감옥 안의 사람들까지 감화시켰다. 그의 이런 태도에 감동한 인천 감옥의 일본인 간수조차 그의 인격에 존경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김창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단순한 청년이 아니었다. ‘나라를 되찾지 않고서는 결코 이 땅에 다시는 평온이 없다’는 결심이 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

출소 후, 그는 전국을 돌며 스승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의병 활동에도 가담했다. 특히 구한말 혼란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의식을 키워갔다. 그리고 이름을 ‘김구’로 바꾼다. 이는 자신의 과거를 묻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었다. ‘구(龜)’는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담고 있었다.

1910년, 국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자 김구는 결단을 내린다. 그는 조국을 떠나 망명을 결심하고,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임시정부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그는 행정기관뿐 아니라 군사 조직까지 총괄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는다. 특히 백범 김구는 외교, 군사, 교육, 선전 등 모든 방면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지켜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에겐 하루하루가 전쟁이었고, 동지들의 죽음은 가슴을 찢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시련 속에서도 끝없이 희망을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실천이었다. 김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이후의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까지 갖고 있었다. 단지 일본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나라, 정의롭고 문화가 있는 나라를 꿈꿨다.

이러한 김구의 철학은 그가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있으면서 수없이 반복한 연설, 교육, 서신 등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희망과 책임을 동시에 심어주려 노력했다. “너희는 조국을 다시 세울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며, 단순히 해방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미래까지 함께 그려나가자고 외쳤다. 그는 늘 조국의 내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백범의 마지막 소원, 그리고 조국의 내일

광복이 가까워지던 1940년대, 김구는 중국 충칭에서 마지막 투혼을 불태운다. 광복군 창설에 깊이 관여하며 무장 독립투쟁의 전열을 정비했고, 연합국과의 협력을 위해 외교에도 앞장섰다. 그는 단순한 군 지도자가 아니었다. 국제 정세와 조선의 위치를 꿰뚫어본 정치가였으며, 한민족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1945년,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의 날이 찾아왔지만, 김구는 기뻐할 수 없었다. 조국은 다시 둘로 나뉘고 있었다. 미군정과 소련정권, 그리고 분단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김구는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몸부림쳤다. 이승만과는 해방 후 행보가 달랐고, 결국 정치적 노선 차이로 갈등도 깊어졌다.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올라간다. 김일성과의 회담에서도 “통일된 나라만이 진정한 독립”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 현실은 냉혹했고, 외세의 이해관계가 조국을 가르고 있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는 안두희의 총격으로 암살된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가장 평화로운 공간에서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김구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된 조국이 아직 진정한 자유와 정의를 되찾지 못했다는 현실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눈물로 그를 보내며, 그의 유언과도 같은 말들을 되새겼다. “나는 통일된 조국에서 죽고 싶다”는 그 소망은 아직도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이었고,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 나와 백범의 영정 앞에서 울음을 삼켰다. 그가 남긴 글 ‘백범일지’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민족정신의 교과서로 읽히고 있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거쳐 광복과 좌절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고뇌와 철학, 그리고 순수한 애국심이 진실하게 담겨 있다. 김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다운 나라, 사랑이 있는 나라를 원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그의 말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 문화의 힘이 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김구 선생의 이상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진정한 ‘대한민국다움’의 기준이다. 통일되지 못한 조국, 갈라진 민심, 경쟁에 내몰린 사회 속에서 그의 말은 여전히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뜻은 살아 있다. 백범 김구는 단지 독립운동가나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 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물었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택하셨습니까?" 김구는 웃으며 말했다. "내 나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