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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단 톤즈마을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

by 황금냥진콩 2025. 7. 30.

남수단 톤즈마을의 슈바이처 이태석신부님
모든것이최고! 이태석신부님

이태석 李泰錫 (1962.10.17~2010.1.14)
선종 직전에 "Everything is good!"(모든 것이 최고!)라는 말을 했다고 동료 수도자들이 증언한다.

사랑이 가득한 그는 실천하는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남수단아이들과 함께 이태석신부님

 

아프리카에 사랑을 남긴 사람

의사가 아닌, 사람을 고치려 한 남자

이태석 신부는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의대에 진학해 의사라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일보다, 마음까지 치유하고자 했던 그는 가톨릭 신앙에 따라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의사의 길을 뒤로한 채 사제서품을 받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삶은 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전쟁의 땅, 수단 톤즈로 향하다

 

2001년,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작은 마을 톤즈에 도착한다. 이곳은 수십 년간 내전으로 피폐해졌고, 의료 시설은 전무했으며, 많은 아이들이 병과 기아로 생명을 잃는 땅이었다. 그는 그곳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장 약과 의료기구, 교육 자료를 챙겨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다. 진료소를 짓고, 쓰러져가는 집을 고치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그의 손길은 점차 마을 전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신부이자 의사, 때로는 건축가, 때로는 교사로 톤즈 마을의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 나갔다.

의료를 넘어 교육으로

이태석 신부는 단지 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의 미래를 고민했다. “아이들의 눈빛이 어두운 건 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던 그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학교를 짓고 교재를 만들었다. 또한, 한국에서 쓰던 교복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가난해서 신발 없이 다니던 아이들에게는 운동화를 손수 고쳐 신겼다. 글을 읽지 못하던 아이들이 그의 손을 거쳐 점점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눈에 아이들은 환자가 아닌, 미래 그 자체였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사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태석신부의 생애에 감동받은 구수환감독은 부활 이라는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그과정중 남수단작은톤즈마을에서 이태석신부님이 지은 허름한 학교에서 6년만에 국립대의대생 57명 공무원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70명의 제자들을 찾을수있었다고한다.,, (구수환감독은 불교신자이고 은퇴자금을 털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음악이 흐르는 사막의 학교

 

톤즈 마을에는 전기도, 악기도 없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는 한국에서 직접 트럼펫, 클라리넷, 드럼 등을 들고 와, 처음 악기라는 것을 본 아이들에게 하나씩 연주법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맨발로 흙바닥 위에서 트럼펫을 불며 연습할 때, 신부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음악은 그 아이들의 영혼을 깨운다.” 그가 이끈 톤즈의 브라스 밴드는 마을에 울려 퍼졌고, 절망뿐이던 땅에 처음으로 웃음과 리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은 단지 소리가 아닌, **사랑의 표현**이었다.

 

신발 한 켤레의 의미

 

어느 날, 이태석 신부는 맨발로 다니는 한 아이를 발견한다. 발은 상처투성이였고, 그 아이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신부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아이에게 신겼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이건 제 인생 첫 신발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날 밤, 신부는 맨발로 진료소를 정리하다가 발바닥이 찢어졌다. 동료가 왜 맨발이냐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 아이보다 더 나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것도 내어주며, 고통조차 사랑의 일부로 여겼다.

 

암 선고, 그리고 귀국

 

2008년, 이태석 신부는 한국으로 잠시 귀국했다. 계속되는 피로와 복통을 참아왔지만, 결국 그는 말기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된다. 이미 간까지 전이된 상태였고, 의료진은 6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병상에서도 걱정은 오직 톤즈 아이들이었다. “내가 없으면 아이들이…”라는 말을 되뇌며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그는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후원자들을 걱정하며 마을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죽음 앞에서도 그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품은 아프리카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톤즈 마을에서는 “신부님이 다시 돌아오신다”는 소식에 모두가 기도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다시 그 땅을 밟지 못했다. 2010년 1월, 이태석 신부는 58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장례식이 치러진 날, 수단에서 그의 제자들이 보내온 영상 속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신부님은 저희의 아버지였어요.”라는 말과 함께, 그가 가르친 아이들은 음악을 연주하며 그를 추모하였다. 그의 음악, 그의 손길, 그의 기도는 그렇게 아이들의 가슴에 남았다.

 

제자 존 마리오의 고백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몇 해 뒤, 그의 제자였던 ‘존 마리오’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신부님이 만든 첫 번째 톤즈 밴드 출신입니다. 신부님이 악기를 주시고, 글을 가르쳐주시고, 마음을 보듬어주셨습니다. 지금 저는 수단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처럼 저도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도우려 합니다.” 신부가 남긴 삶의 씨앗이, 제자들을 통해 다시 자라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다.

 

울지 마 톤즈, 그리고 남겨진 사랑

 

2010년,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울지 마 톤즈’가 방영되며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그의 이름은 조용히 묻혀있던 한 성직자의 삶을 넘어서, 진정한 인류애와 헌신의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를 기억하는 후원 단체와 학교, 음악단체가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오늘날 톤즈 마을에는 여전히 신부님의 사진이 걸려 있으며,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가 심은 사랑은 지금도 살아 있다. 

사랑이 가득하고 마음이 깨끗하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이들은 왜 아프고 핍박받고 힘든 삶을 사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오래오래오래 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낸 그는 꼭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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