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본의 임금, 세종대왕
제1부: 인간 이도, 백성을 품은 왕의 탄생
외롭고도 빛났던 셋째 아들, 이도
세종대왕은 1397년,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도. 조선 왕가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 서열에 앞서 있었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정치와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다듬어야 했다. 양녕대군은 재능이 뛰어났으나 자유로운 기질을 지녔고, 효령대군은 종교와 명상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이도는 학문을 사랑하고 말수가 적은 인물로, 오히려 신중하고 치밀한 면모가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태종 이방원조차 "셋째가 도리어 임금의 그릇이다"라고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궁 안의 늙은 하인이 실수로 이도의 서책에 물을 엎질렀다. 하인은 무서워 떨었지만, 이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물은 마르면 그만이지만, 사람 마음은 상하면 회복이 어렵다"며 웃으며 다독였다고 한다. 이 작은 일화 속에도 훗날 백성을 품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뜻밖의 왕위 계승, 무거운 왕좌
1422년, 결국 태종은 장자 양녕대군이 아닌 이도를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조정 안팎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이도는 성실하고 공정하게 세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1418년, 태종이 양위를 하며 그는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나이 겨우 22세였다. 왕위에 오른 이도는 “정치는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철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버지 태종의 강력한 후견 아래에서도 차츰 자신의 색을 드러냈다. 특히 조선의 유교적 질서를 굳건히 하되, 백성의 삶을 더 잘 들여다보는 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즉위 초기, 세종은 백성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신하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민심을 직접 듣게 했다. 돌아온 보고서에는 굶주림과 병으로 고통받는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했고, 그는 밤새 그 보고서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픔을 껴안는 왕, 형제를 보듬다
즉위 후에도 그는 형제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특히 양녕대군에 대해 세종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양녕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 전국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았지만, 마음속에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한 번은 양녕대군이 백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시를 읊다가 관리에게 붙잡혀 궁에 끌려온 일이 있었다. 신하들은 죄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세종은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형은 세자였던 분이다. 그분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이 사건 이후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종이 단지 훌륭한 왕이 아니라 ‘정이 깊은 임금’이라는 평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적인 형벌보다 이해와 포용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택했다.
백성을 위한 정책, 끊임없는 개혁
세종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과학,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시도했다. 농사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구조 속에서, 농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농사직설>이라는 책을 펴내게 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로, 실제 농민들과 대화를 통해 내용을 채웠으며 각 지역의 기후에 맞는 작물 재배법까지 담았다. 또한 백성들이 추운 겨울에도 불을 피워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온돌 구조 개선’을 직접 검토한 기록도 있다. 이는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의 생활 그 자체를 고민했다는 증거였다. 세종은 세금 제도에서도 개혁을 추진했다. 공평한 조세 제도를 위한 대동법 기초와 토지 조사에 힘쓰며, 불합리한 세율을 바로잡았다. 또한 장애인과 과부, 고아들에게 곡식을 나누는 혜민서와 제생원의 활동을 늘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과학과 기술, 하늘을 측량하다
세종대왕은 하늘의 이치를 통해 백성을 돕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장영실, 이천, 김조 등 천문과 역법에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해시계) 등을 개발하게 했다. 특히 측우기는 세계 최초로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한 기구로, 농사의 계획과 기후 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문기기를 제작할 예산을 직접 마련했다. 하루는 장영실이 자격루의 부품을 실수로 깨뜨린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그를 파면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기계는 고칠 수 있으나, 사람의 재능은 다시 얻기 어렵다.” 장영실은 눈물을 흘리며 더 완벽한 자격루를 만들어 다시 임금 앞에 내놓았다. 이 장면은 오늘날까지도 지도자의 포용력에 대한 전설처럼 전해진다. ---
민본의 임금, 세종대왕 – 제2부: 훈민정음과 마지막 생애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의 탄생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단연 **훈민정음 창제**였다. 그 당시 조선의 공문서는 한문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상류층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백성은 이름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이런 현실에 깊이 가슴 아파했다. 그는 조용히 집현전을 조직하고, 학자들과 함께 백성을 위한 문자 개발에 착수했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 반포되었으며, 단 28자의 기호로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훈민정음 서문에는 세종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니, 이를 가엾게 여겨 새 글자를 만든다.” 이 한 문장은 그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민본정신**의 정점을 보여준다. 한번은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가르치기 위해 궁 밖의 백성을 불렀다고 한다. 어떤 노파가 나와 글자를 익히자 감격해서 울었고, 세종은 그 눈물을 닦아주며 “이 글자가 너희의 억울함을 풀 수 있으면, 나는 이 일을 백 번 해도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도 백성 사이에서 오래도록 전해졌다.
고통 속의 정치, 병과 싸우다
세종은 중년 무렵부터 **심한 당뇨와 안질**로 고통받았다. 특히 말년에 접어들며 시력은 크게 악화되었고, 몸의 여러 부분에 통증이 심했다. 그러나 그는 하루도 정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궁궐의 경회루 옆 온돌방에서 몸을 기대어 정사를 돌보며, 신하들의 목소리만으로도 결정을 내릴 정도로 통찰력이 깊었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음악, 의학, 농업 연구를 계속 지시했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사전을 완성하도록 했다. 이는 한의학뿐 아니라 중국과 아랍의 의서까지 집대성한,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남았다. 그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끔 백성들을 위한 음식을 시험 삼아 먹으며, 독이나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의 지극한 백성 사랑은 육체적 고통보다 강했다.
자신을 지우고 백성을 남긴 임금
세종은 말년에 이르러 큰 아픔을 안게 된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 세자(문종)가 병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자식을 걱정했고, 조선의 미래를 위해 수많은 기록과 지혜를 남겨두었다. 1450년, 세종은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훈민정음**, **농사직설**, **측우기**, **의방유취**, **집현전 학자 육성**, **평등한 조세 개혁** 등은 하나같이 **백성을 위한 것이었고**, 세종은 스스로의 이름보다도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를 더 소중히 여겼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명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신하들과 가족들 앞에서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내가 죽은 후에도, 백성의 눈물을 기억하라.” 그는 끝까지 ‘왕’이기 전에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영원히 살아 있는 이름, 세종
세종의 사후, 그의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내려졌으며, 이는 그가 남긴 업적과 인품을 모두 아우른 표현이었다. 백성들은 그의 무덤인 영릉을 찾아 절을 올렸고, 그가 창제한 훈민정음은 이후 수많은 민초들의 삶을 바꾸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1만 원권 지폐에는 세종대왕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것은 단지 그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준 마음 때문**이다. 세종은 왕 중의 왕이었지만, 결코 높은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백성과 눈높이를 맞추고, 말 없는 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려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임금**, **가장 위대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