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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by 황금냥진콩 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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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안창호 선생님의 사진
우리가 잘알고있는 안창호 님의 사진

민족의 스승, 안창호의 깨어남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나, 책과 학문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 컸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글을 익히며 남다른 사색을 거듭하던 그는 열다섯 살 무렵부터 이미 조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는 교육이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고, 그 사상은 훗날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철학이 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나며 조선은 급속한 혼란에 휘말렸다. 이 시기 안창호는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도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큰 산처럼 모든 것을 품고 견디며, 민족을 이끄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다짐을 담고 있다. 숭실학교 재학 중 그는 학교를 다니며 농사를 짓고 품팔이를 하면서도 누구보다 성실히 공부에 매진했다. 이 시기의 노력은 그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1902년, 안창호는 더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부설 어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며, 동시에 조선인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을 돕는 활동을 펼친다. 그곳에서 그는 한인들이 차별받고 무지 속에 방치되어 있는 현실을 마주한다. 그는 단순히 공부하는 유학생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이민 사회 안에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03년, 그는 미국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설한다. 이 단체는 훗날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여, 독립운동 자금과 조직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안창호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민족의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단순한 구호가 아닌 실천하는 독립운동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이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함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조국이 약소국으로 전락해 가는 현실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우리의 독립은 총칼만으로 이룰 수 없다. 국민의 품성과 지식이 따라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이상론이 아닌, 철저히 현실을 꿰뚫는 통찰이었다. 이 시기의 안창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교육자, 실천가로서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사진 부인 이혜련 여사,(왼쪽부터 필선 수라 필립 )

 

조국을 품은 큰 산, 도산 안창호의 헌신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하여 본격적인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먼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과 실용적 학문을 동시에 가르쳤다. 그는 단순히 독립운동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길러지는 독립’을 강조했다. 그는 "진정한 독립은 민족 스스로가 준비되지 않으면 얻어도 유지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교육과 민족운동은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안창호는 신민회 창립에도 중심 인물로 참여한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를 넘어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조직으로, 국내외 조직망을 갖춘 최초의 근대적 독립운동 단체였다. 그는 ‘실력양성’이라는 신념 아래 인재를 길러내는 데 몰두했고, 이러한 신념은 훗날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는 민족적 역량으로 이어졌다. 그는 늘 말보다 행동으로 설득했다. 그의 말은 선동이 아니라 설득이었고, 강요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안창호의 활동을 좌시하지 않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강제로 이루어진 후, 그는 재차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를 재정비하고 독립운동의 재기반을 마련한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도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임정 수립 후에는 내무총장으로 선출되어 조직을 정비하고 법제도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는 "우리는 패배한 민족이지만, 패배한 정신을 가진 민족이 되어선 안 된다"며 다시금 국민의식 고취에 힘썼다.

감동적인 일화 중 하나는, 그가 상해에서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아끼던 외투를 팔아 그 돈으로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점심을 사주었다. 함께 먹은 밥은 찬물에 말아진 국 한 그릇뿐이었지만, 그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배를 곯아선 안 된다. 나는 지도 자니까 배고파도 된다"라고 말했다. 굶주림 속에서도 그가 나눈 것은 음식이 아니라 ‘희망’이었고, 그 희망이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920년대 중반, 안창호는 국내외를 오가며 끊임없는 강연과 교육을 이어갔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며 수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떠한 순간에도 폭력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이 서로 미워하고 분열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먼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는 상해 임시정부를 탄압하며 안창호를 체포한다. 국내로 강제 송환된 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1938년 3월 10일 경성병원에서 서거한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린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후대에 길을 열었다.

도산 안창호의 삶은 단 한 번도 요란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는 늘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조국을 위해 걸었다. 교육자, 계몽가, 조직가, 지도자 그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그는 ‘민족을 위한 사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이름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그의 씨앗은 민족의 가슴속에서 싹을 틔웠고, 지금도 우리에게 묵묵히 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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