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許浚, 1539~ 1615. 10. 9)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양반이 아닌, 백성을 위한 의원
1539년, 조선 중종 34년. 허준은 서울 동대문 인근에서 평민 출신의 중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의관 집안으로, 아버지 허론은 관청에서 의술을 펼치는 관상감 소속 의원이었고, 허준도 자연스럽게 의술을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신분의 벽은 높았다. 유교 사회에서 중인은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의술은 양반 계층에서 천하게 여겨지는 분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준은 일찍부터 “병이 있는 자는 모두 귀하다”는 철학을 품고, 명의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기회가 아닌 실력과 진심으로 조선 최고의 의원이 되어간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환자의 손을 잡다
젊은 시절 허준은 지방 관아에서 의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창 여름, 장티푸스에 걸려 버려진 백성이 길에 쓰러져 있었다. 고위 관리들은 병이 옮을까 봐 가까이 가지 않았고, 다른 의원들도 외면했다. 허준은 맨손으로 그 환자를 부축해 자기 집으로 데려와 치료했다. “병든 자의 몸에는 천한 이도, 귀한 이도 없다”라고 말한 그는 며칠간 밤을 새워 죽을 끓이고 약을 다려 마침내 그 백성을 살려냈다. 이 이야기는 곧 조정에도 전해졌고, 허준은 ‘진정한 의원’으로 불리게 된다. 훗날 그 백성은 허준의 제자가 되어 전국을 돌며 무료 진료를 펼쳤다고 한다.
왕의 주치의가 되기까지
허준은 선조의 눈에 들어 어의로 발탁된다. 당시 조선은 왜란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왕은 끊임없는 피난과 전염병 속에서 허약해져 있었다. 허준은 선조의 체질과 병세를 면밀히 분석해 맞춤형 치료를 시도했고, 왕의 건강을 차츰 회복시킨다. 그는 궁궐 안에서조차 결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신중한 말과 조용한 손놀림으로 주위의 신임을 얻었다. 단순한 의술뿐 아니라, 식이요법과 휴식, 정신 안정까지 고려한 그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보는 의원’으로 불리게 된다. 왕실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는 평민 환자를 꾸준히 돌보았고, 한 번도 돈을 받고 진료한 적이 없었다.
의학을 기록으로 남기다
허준은 전쟁과 피난, 기근을 겪으며 “지식은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의 치료 경험과 동양의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동의보감’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질병의 원인과 처방, 진단법, 약초의 성질과 사용법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닌 ‘백성을 위한 생명백과사전’이었다. “의술은 곧 사랑이다”라는 신념으로 밤낮 없이 글을 쓰던 그는 약초를 직접 캐고, 지방 병자를 돌보며 각지의 사례를 수집해 기록한다. 이 시기 그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옆에서 글씨를 받아 적던 제자가 건강을 잃을 정도였다.
전쟁 속에서 완성된 생명의 책, 동의보감
1596년부터 집필된 ‘동의보감’은 무려 15년의 세월이 걸려 완성되었다. 왜란과 이괄의 난, 기근과 전염병이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지만, 허준은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집필 공간은 궁궐의 방 한 칸에서 시작해, 피난길의 초가집, 어느 산사의 빈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종이는 모자랐고, 먹도 떨어졌으며, 수시로 병자들이 찾아와 기록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늘 내가 적지 않으면, 내일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신념으로 그는 한 글자, 한 처방을 기록해 나갔다. 그는 매 처방에 ‘약값이 싸고 구하기 쉬울 것’, ‘누구든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글자에 피를 묻히다
동의보감의 마지막 원고를 완성하던 날, 허준은 손가락이 부르터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글을 쓰고 있었다. 제자가 붓을 거두려 하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 손이 멈추면, 조선의 병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네.” 그가 쓴 마지막 장에는 손끝의 피가 묻은 자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이 원고를 인쇄하던 간행소 장인은 그 흔적을 그대로 남겼고, 지금도 초간본 일부에는 미세한 붉은 얼룩이 보인다고 한다. 이는 허준이 단순히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깎아 백성을 살리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고난 뒤에 남긴 위대한 유산
1613년, 허준은 드디어 ‘동의보감’을 완성해 조정에 바친다. 하지만 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중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책의 간행을 반대했고, 책의 내용 또한 유교적 예법에 어긋난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하게 명한다. “이 책은 백성을 살리는 것이니, 그 어떤 문장보다 귀하다.” 결국 동의보감은 국왕의 명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일본, 중국, 유럽까지 전해져 동양 의학의 표준이 되었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세계의 유산이 되었다.★
삶이 곧 의술이었던 사내
허준은 말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조용히 은거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의술은 백성의 숨을 듣는 일이다.”는 그의 말은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전해졌다. 그는 한겨울에도 병자를 찾아다녔고, 마지막까지 병상 위에 있던 환자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1615년, 그는 숨을 거두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단 하나였다. “환자는 지금 열이 많네… 수분을….” 그는 그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치료하고 있었다.
허준. 그는 조선의 신분 제도를 넘어, 사랑과 지혜로 백성을 품은 ‘참된 의원’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아픈 이들을 향한 마음의 상징이 되었다. 동의보감은 책이지만, 그의 삶 그 자체였다.
천사 같은 마음의 누군가를 위하는 사랑이 가득했던 천재 허준 우리는 감사하고 존경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