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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장군 이순신 한산대첩의 거북선 , 백의종군과 최후의 노량해전 까지

by 황금냥진콩 2025.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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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장군 백의종군 이순신 실제 초상화의 그의 얼굴은 굉장히 무섭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신화같은존재 이순신장군

 

불멸의 장군, 이순신 –(1545.4.28~1598.12.16)

이순신 장군님의 실제 얼굴
우리의 우상 자랑스러운위인 이순신 장군님

 

제1부: 유년기부터 한산대첩까지

불우했던 소년, 절망 속에 씨를 뿌리다

이순신은 1545년 서울 건천동(현재 서울 중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무관 가문이었으나, 조부의 좌천으로 집안의 기반이 약해진 상태였다. 아버지 이정은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이 단정했지만,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난하고 힘든 집안 환경 속에서도 이순신은 조용하고 강직하게 성장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나무로 칼을 깎아 병사를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16세가 되었을 무렵, 이순신은 무과에 도전하기 위해 기량을 갈고닦았다. 그러나 처음 치른 시험에서는 낙마로 인해 낙방했다. 낙심했을 법도 한 실패였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끈기 있게 재도전했고 결국 32세가 되던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로 첫 관직에 나아갔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 늦은 시작이 오히려 이순신에게 더 깊은 인내와 강한 신념을 안겨주었다.

변방의 수비관, 백성을 품다

이후 이순신은 함경도 북방의 두만강 부근에 배치되었다. 그곳은 추운 기후와 물자 부족으로 병사들의 생활이 열악했다. 이순신은 추운 겨울에도 병사들의 병영을 직접 돌보며, 무기와 식량을 보급하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이 탄 화살촉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순신은, 직접 사냥을 다니며 노루 뼈를 구해 화살촉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이를 본 상관이 감탄하며 상을 내리려 했지만, 그는 “이는 장수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조용히 물러났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순신은 따뜻한 인물이었다. 세금과 공납으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을 위해 개인 쌀을 풀어 굶주림을 막고, 병든 자에게 약을 구해주었다. 그는 권력을 탐하거나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종종 상관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백성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신뢰받는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그리고 첫 승리

1592년 4월,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했고,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조선 수군도 마찬가지였다. 수군은 무기와 선박이 부족하고 체계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는 수군을 재편하고 병선과 무기, 식량을 직접 확보했다. 무엇보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우리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그의 신념이었다. 1592년 5월,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맞아 첫 전투에 나섰다. 철저한 전략과 매복으로 일본 함선을 기습했고,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백성들은 그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바다가 살아 있다”라고 외쳤다. 이어진 합포, 당포 해전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고, 이순신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백성들은 그가 전쟁 중에도 민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적선을 바다 깊숙이 유인해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감동했다.

왜군들이 얼굴만 봐도 벌벌 떨었다는데 정말 공감이가는 넘치는 카리스마의 장군님

전설이 된 한산대첩, 거북선의 위력

1592년 7월, 이순신은 일본군의 수군 주력부대를 격파하기 위해 한산도 앞바다로 병력을 이끌었다. 이때 그는 거북선을 최초로 실전에 투입했다. 쇠로 덮인 등껍질, 작은 대포, 적이 올라타지 못하게 한 쇠못 장치 등은 일본군에게는 충격이었다. 이순신은 학익진이라 불리는 학 모양의 진형으로 일본 수군을 포위했다. 적의 선단은 중심을 잃고 허둥대다가 줄줄이 침몰했고, 바다는 불길과 연기로 가득 찼다. 이순신은 그 어떤 전투보다도 전략과 지형, 조류를 철저히 분석해 전투에 임했다. 한산대첩은 조선 수군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육상 병력의 보급도 막히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하늘이 준 장군”이라 부르며 그의 승전을 찬양했다. 이순신은 승리 후에도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의 피로를 걱정하며 직접 약초를 달여 나눠주었고, 전사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해 가족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 진심은 단순한 장수가 아닌, 진정한 민중의 수호자였다.

진심으로 백성을 품은 장수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영광을 앞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싸우는 이유는 오직 백성과 나라 때문”이라며, 승전 소식을 접한 조정의 포상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당시 전라도 해안 마을 한 곳에서는 이순신이 물자 부족으로 고생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쌀과 천을 모아 배에 실어 보냈다. 이순신은 그것을 받고 크게 감동했지만, 병사들보다 마을 노인들에게 먼저 쌀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남겼다. 편지에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장수의 도리”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불멸의 장군, 이순신 – 제2부: 백의종군과 최후의 노량해전

억울한 옥살이, 무너진 정의

1593년, 조선 조정은 명나라 군대와의 외교 문제와 내분 속에서 혼란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이순신의 존재는 너무도 빛났고, 일부 대신들과 권력자들은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원균은  이순신의 지휘력과 명성을 질투하며, 그를 헐뜯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조정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심지어 고문을 가하며 투옥했다. (지금 봐도 조선은 허례허식만 쓸모없는 양반들이 권력에만 눈이 멀어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의인들을 괴롭히는 정말 악랄한 정권에 있던 나라이다.)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과 병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나라를 지킨 장수를 이렇게 다루다니…”라는 탄식이 전국에 퍼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담담히 병사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수군의 안위를 염려했다. 그 해, 조정은 원균을 수군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원균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조선 수군을 사실상 전멸시키고 말았다. 이때 조정은 비로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다시 이순신에게 수군 재건을 명령했다. 당시 수군에 남은 병선은 고작 12척뿐이었다. 

백의종군, 다시 시작된 신념의 항해

1597년, 이순신은 갑옷조차 입지 못한 채 백의(흰 옷)를 입고 전선에 섰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군님이 돌아오셨다”며 환호했다. 하지만 그는 환호보다 절박한 상황을 먼저 살폈다. 일본 수군은 이미 대규모로 부산에 집결해 있었고, 조선의 바다는 거의 장악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병사들과 밤낮없이 훈련을 반복하며 12척을 움직였다. 그의 명언인 “아직 전선 열두 척이 남아 있사오니 신에게는 아직 싸울 힘이 있습니다”는 이때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처럼, 그는 명량 해전에서 133척의 일본 대함대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고, 병사들에게 전투 의지를 심어준 그의 지휘는 신화처럼 남았다. 명량 해전 이후, 조선 수군은 다시 바다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백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밤새 제사를 올렸다.

전장의 마지막, 노량해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그 과정에서 치열한 후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끝까지 적의 철수를 견제하며 백성 보호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 그는 명나라 진린 장군과 연합하여 노량 앞바다에서 마지막 전투에 나섰다. 전투는 밤새 이어졌다. 수많은 일본군 함선을 침몰시키며 전세는 조선 수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새벽녘,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전열이 흐트러진다.” 이순신은 말 그대로 **죽음조차 전쟁의 도구로 바꾼** 장수였다. 전투가 끝나고, 조선 수군이 승리를 확정 지은 후에야 그의 죽음이 전해졌다. 전장은 조용해졌고, 병사들은 그를 안고 끝없이 울었다.

장군이 떠난 바다, 그리움만 남다

이순신의 죽음은 백성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고, 그의 이름을 들으면 아이들도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의 진린 장군은 “조선은 성인(聖人) 장군을 잃었다”라고 말하며 조문했고, 일본군 장수들도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죽은 뒤, 이순신은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그가 지낸 통영에는 충렬사가 세워졌고, 조선인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가 남긴 전적은 단순한 승리 이상의 의미였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모함을 당하고, 백의종군의 치욕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나라와 백성을 지킨 이순신. 그는 단 한 번도 조선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걱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지금도 많은 이의 가슴에 남아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순신의 동상 앞에는 꽃이 끊이질 않는다. 조선의 바다를 지킨 그 장수, 이순신. 그의 삶은 바람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세월을 견디며 더욱 선명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