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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하나였던 광복군 사상계를 통해 진짜 독립을 준비하다 장준하

by 황금냥진콩 2025. 7. 22.

독립운동가 교육인 언론인 이였던 장준하 선생님에 대해서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의 부패, 친일, 언론탄압 의혹을 비판하면서 경영난에 시달렸고 1970년5월 당시의 권력층의 비리를 신랄하게 비핀한 김지하 시인의시가 사상계에 발표되자 즉시폐간 되며 장준하 역시 의문사로 사망

 

장준하 (張俊河, 1918.8. 27~1975. 8.17

독립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사회운동가

 

신념 하나로 일어난 청년

 

1918년 경기도 의주군(현 파주시)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그는 일본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늘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자각을 버리지 않았다. 도쿄 육군지원병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길러지기를 거부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던 중, 그는 결단을 내렸다. 1944년, 그는 학도병으로 위장 입대해 탈출을 감행하고 만주를 거쳐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향한다. 이 선택은 생사를 건 도전이었고, 조국을 위한 투신이었다.

 

 조국행 탈출, 죽음을 건 13일

 

1944년 여름, 일본군 복무 중이던 장준하는 중국군과 교전 중 혼란을 틈타 탈출한다. 그는 쫓기며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총상을 입기도 했다. 산속에서 며칠을 굶은 채 헤매다 결국 조선인 밀정과 마주치게 되는데, 뜻밖에도 그 밀정은 그를 돕는다. 이유를 묻자, 밀정은 “나는 밀정이지만, 너 같은 사람은 살아야 해. 너는 진짜 조선이니까”라고 말했다. 장준하는 그의 도움으로 연합군 접선지까지 도달했고, 총 13일간의 탈출 끝에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 도착했다. 이 실화는 훗날 ‘조국행 13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광복군, 그리고 진짜 독립을 위한 투쟁

 

충칭에 도착한 장준하는 곧바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김구 선생의 지도 아래 훈련과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일본군의 무전과 교신을 해독하는 정보 요원으로 활동하며, 전략 부대에서도 활약했다. 무엇보다 그는 무력투쟁보다 사상의 힘을 믿었다. “진짜 독립은 외세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는 이 신념으로 청년 광복군들을 교육했고,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헌신했다. 광복이 다가오자,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해방 이후의 조국에 대한 비전을 나누었고, 교육과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방의 기쁨, 그러나 또 다른 전쟁의 시작

 

1945년 해방. 그러나 장준하가 맞이한 조국은 이상과 달랐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고, 친일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쥐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독립운동을 해야겠다.” 그는 씁쓸히 말했다. 장준하는 좌우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진짜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진영을 떠나 백성의 편에 서기로 한다. 이 무렵 그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창간하며 민중 계몽과 민주주의 교육에 앞장선다. 잡지는 금세 전국적 반향을 일으켰고, 장준하는 단숨에 시대의 지성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사상계’와 양심의 펜, 독재에 맞서다

 

장준하가 창간한 월간지 사상계는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시대의 나침반이었고, 민중의 눈이었다. 그는 언론인의 위치에서 독재를 고발했고, 부정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특히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날 선 비판을 이어갔다. 장준하는 “총으로 나라를 뒤엎은 자들이 말하는 ‘구국’은 국민 없는 독재일 뿐”이라며 연설했고, 사상계 지면에서도 그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수차례 투옥되었고, 잡지는 결국 폐간되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지금, 또 다른 투쟁을 시작한다”며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다.

 

 감옥 속에서 보낸 아들에게의 편지

 

1962년, 군정 비판으로 투옥되었을 당시, 장준하는 막 세 살이 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준호야, 아빠는 지금 감옥에 있단다. 하지만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떳떳해서란다. 나중에 커서 네가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한 번쯤은 참된 것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편지는 훗날 장준하 평전을 통해 공개되었고,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단지 지식인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유신체제, 그리고 장준하의 최후

 

1972년,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장기집권을 시작한다. 장준하는 공개적으로 유신을 비판하며 전국을 돌며 강연을 이어갔다. “유신은 헌법이 아니라 쿠데타입니다. 국민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거세졌고, 민심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정권은 경계했고, 감시를 강화했다. 1975년 8월 17일, 그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 등산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공식적으로는 ‘실족사’로 발표되었지만, 시신의 상태와 당시 정황은 많은 이들이 타살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살아서 독재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어서도 시대를 흔들었다.

 

죽어서도 지켜낸 진실

 

장준하의 죽음 이후, 전국 각지에서 추모제가 이어졌고, 대학가에서는 ‘장준하 정신을 잇자’는 선언이 쏟아졌다. 그의 장례식은 하나의 민주주의 운동이 되었고, 그의 아들 장호준 목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진실 없이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장준하는 지금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권력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았던 펜이었고, 외로운 투쟁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진실한 아버지. 그는 단지 한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이 아니라, 시대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죽겠다고 광복시켰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친일파들이 정권을 쥐고 호의호식하며 목숨 걸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깨어있던 사람들을 괴롭히고.. 우리나라는 권력을 지고 있던 인물들이  정상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할 정도이다.. 

이런 분들이 괴롭힘 당해서 우리가 여기 살고 있을 수 있었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평범한 시민은 미안하고.. 죄송하고... 감사하고... 기가차고.. 화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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