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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아들 오산학교를 설립 빛나는 삶의방식 이승훈

by 황금냥진콩 2025. 7. 21.

 

모두에게 공평한교육을위해 직접 학교를 설립한 오산학교 설립자 교육자 독립운동가 이승훈
사진도 없다..독립운동가들은 사진도 귀하다 ....... 이승훈 님의 사진

 

 

 

이승훈  李昇薰, 1864. 3. 25 ~ 1930. 5.9)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양반의 아들, 민중의 길을 걷다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지위를 누렸지만, 어린 시절의 이승훈은 권위보다 정의와 진실에 끌리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유교 경전을 통달한 인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을사늑약까지 이어진 조선의 멸망 앞에서, 그는 특권을 누리는 삶이 아닌 백성을 위한 삶을 결심하게 된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그는 밤새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나라가 없어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그 질문 앞에서 인생을 바꾸기로 한다.

조선에 ‘학교’를 세우다

1907년, 그는 전 재산을 털어 평양에 오산학교를 설립한다. 당시 교육은 양반 자제에게만 주어졌고, 백성들은 글조차 배우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누구나 배워야 나라가 산다”라고 외쳤다. 학교를 지을 때, 그는 집안 재산을 정리해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 돈이 부족하자 자신이 살 집을 팔았고, 결국 남은 건 초라한 방 한 칸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 하나 불편하면 천 명이 밝아진다”는 그의 말은 지금도 오산학교 교정에 새겨져 있다. 오산학교는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지도자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었다.

신앙과 민족의 길을 함께 걷다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당시, 그는 첫날부터 참여하여 마음을 다해 회개하고 헌신을 결심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하늘과 백성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날의 다짐은 단순한 종교적 감화가 아니었다. 그는 신앙을 행동으로 증명하려 했고, 그것은 곧 민족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신앙은 그에게 헌신과 자기희생, 그리고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는 이후 1910년대 들어 독립운동의 실질적 지도자로 떠오른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독립운동가들과 연결되며, 거사를 도모하고 자금을 조달하며, 수많은 젊은이를 비밀리에 훈련시켰다.

3·1 운동의 숨은 설계자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기 전, 이승훈은 이미 중심에서 그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손병희, 한용운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며, 독립선언서의 기초 단계부터 논의에 가담했다. 그는 종교 지도자와 교육자라는 위상이 있었기에, 체계적 조직과 민중 동원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평양 지역의 독립 만세 시위는 그의 지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는 민중에게 “우리는 총 없이 싸운다. 그러나 마음은 총칼보다 강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 말은 당시 청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스스로 시위 현장에 나서 체포되었다. “지도자는 숨지 않는다. 나도 함께 감옥에 가겠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옥중에서 피운 교육의 불꽃

3·1 운동 이후 체포된 이승훈은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수감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옥중 교육자’로 불렸다. “이 안에도 사람은 있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교육이 있어야 한다.” 감옥 안에서 그가 만든 종이는 얇은 옥중 휴지였고, 펜은 잘라낸 나무젓가락이었다. 제자들은 모두 죄인이었지만, 그는 이름을 불러주며 수업을 이어갔다. “우리는 감옥에 갇혔지만, 사상은 자유다.” 그 말에 힘입어 젊은 수감자들은 희망을 품었다. 그의 제자 중 일부는 출소 후 교육자로 성장하여 해방 이후 교단에 섰고, 몇몇은 독립군으로 합류해 만주로 떠났다.

 어머니 장례를 포기한 선택

이승훈이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족들은 탄원서를 써서라도 잠시 귀향할 수 있게 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도 내가 옳은 길을 택한 것을 기뻐하실 겁니다. 나는 민족 앞에 죄인의 신분입니다.” 결국 그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감옥 안에서 홀로 엎드려 기도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간수가 그를 위해 작은 쌀죽을 가져왔고, 그는 그것을 반만 먹고 반은 다른 수감자에게 나눠주었다. 그날 이후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속죄와 명상의 삶을 살았다. 그 이야기는 후에 간수의 입을 통해 바깥세상에 전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해방 이후의 나날, 그리고 조용한 퇴장

해방 이후, 그는 임시정부와의 협조, 그리고 교육자들의 길을 다시 이어갔다. 하지만 광복 후의 혼란한 정치판 속에서 그는 권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누구보다 앞장설 수 있었지만, 그는 “나는 학교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오산학교의 교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제자들을 만나며 “너희는 정치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노년에 접어들어 시력이 흐려지고 병세가 악화되자, 그는 늘 기도와 독서, 그리고 제자들과의 면담으로 하루를 채웠다. 그는 마지막까지 조용했고, 떠나는 날조차 “하늘은 정의로우니 너희도 정의롭게 살아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승훈, 이름보다 더 빛난 ‘삶의 방식’

이승훈은 권력자가 아니었다. 이름 높은 장군도 아니었고, 유명한 연설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올바른가’를 고민하며 실천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 모두를 버리고 민중과 교육의 길을 걸었다. 그의 삶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온 교과서이자, 지금의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이었다. “나는 지금 정의로운가? 나는 나의 이웃에게 떳떳한가?”

오늘날 오산학교는 여전히 그의 철학을 품은 채 운영되고 있으며, 이승훈이라는 이름은 묵묵히 사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하늘과 백성을 섬긴 위인이었다. 조선의 양반으로 태어나, 민중의 벗으로 살다 간 그를 기억하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아.. 우리나라 위인들은  특히 독립운동가들 어떻게 이렇게..  눈물을 쏙 빼놓는지 모르겠다.. 고문을 버티면서 교육을 하고.. 전재산을 바쳐 교육에 사회에 이바지하고.. 어떻게 그럴까.. 어떻게 그렇게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  부끄럽고 감사하다.. 너무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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