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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시기에 억압받던민족의 저항 한용운 (님의침묵)

by 황금냥진콩 202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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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침묵의 저자로 유명한 한용운 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유공자 ,불교사회주의자 속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호는 만해 이다.
한용운 님의 모습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음력 7월 12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승려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님의 침묵 억압받던 민족의 희망과 저항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며,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서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글로써 민족의 영혼을 일깨우고, 행동으로 독립을 실천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특히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억압받던 민족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읽혔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감수성이 풍부하였으며, 한문과 불교 경전에 능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승려가 되기 위해 설악산 오세암 등에서 수행하며 불교 철학과 민족의식을 함께 키워갔다. 불교는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불교의 자비와 해탈 사상은 훗날 그의 시와 행동 속 깊이 스며들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910년 한일병탄 이후이다. 조선이 국권을 빼앗기자 그는 붓을 들었고, 그 붓은 총칼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그는 일제의 조선 불교 통제에 반대하며 조선 불교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시와 논설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한용운은 33인의 민족대표 중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민족대표 중에서도 끝까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거사 당일 탑골공원에 함께 있었다. 체포 후, 일제의 재판정에서 “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여기 섰으며, 어떤 형벌도 두렵지 않다”라고 담담히 진술하였다. 결국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시는 멈추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쓴 시들은 더욱 날카롭고 절절하였으며, 동료 수감자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출소 후 그는 『님의 침묵』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은 겉으로는 사랑의 님을 잃은 슬픔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님’을 조국으로 상징하며 민족의 아픔과 저항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시구는 당대 청년들의 가슴을 울렸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회람되며 정신적 무기가 되었다. 문학을 통한 저항,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의 시는 직접적인 선동이 아니었지만, 더 깊이 사람들의 내면을 건드리고 행동을 이끌었다.

그는 이후에도 대한불교유신회를 조직하며 불교의 독립성과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이를 탄압하였고, 불교계 내부에서도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는 많지 않았으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조선 불교는 조선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독립 없는 종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삶에는 일관된 신념이 있었다. “나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라는 말처럼, 그는 시인, 승려, 사상가, 실천가 그 어느 하나로도 규정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의 글에는 고요한 침묵과 깊은 절망이 있었고, 동시에 강렬한 저항과 희망이 살아 숨 쉬었다.

그의 유명한 시 님의 침묵을 꼭 알았으면 한다.
님의 침묵
인연설 역시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여 올렷다.
인연설

억압된 시대의 진정한 저항 

한용운 선생은 단지 글과 시만으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는 어떠한 권력이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조선의 자존과 독립이 실현될 그날까지 꿋꿋하게 중심을 지켰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조선에 대한 황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했으며, 민족정신 말살을 목적으로 언론, 교육, 종교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일제의 본질을 비판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 정부가 조선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추진하던 ‘불교통일정책’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불교는 민중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하는 종교이지, 정권에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불교가 식민지 통치의 도구가 되는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뿐만 아니라, 종교의 본래 가치를 지키는 데에도 온몸을 던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모든 지식인과 예술인에게 충성을 강요하였다. 수많은 문인들이 변절하거나 침묵하던 그 시기에도, 한용운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징병령’ 발표에 반대 성명을 작성하였고,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나는 나의 이름으로 죽겠다”는 말은 그의 고결한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 중 하나로, 일제가 그에게 공적 훈장을 수여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자에게 줄 훈장이란, 노예의 족쇄일 뿐이다”라며 이를 거절하고, 훈장 서류조차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의 단호한 태도는 후배 문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 한용운 선생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조용히 저항의 글을 쓰고, 후배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웠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집을 찾았고, 그는 이들에게 “글은 시대를 이겨야 한다. 우리 시대는 침묵할 수 없기에, 너희가 써야 한다”라고 말하며 글을 통한 저항을 당부하였다.

1944년 6월 29일, 한용운 선생은 결국 병세 악화로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곁에는 많은 제자들과 민족운동가들이 함께했고, 그의 마지막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나는 가지만, 민족의 혼은 남아야 한다.” 그는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의 글과 정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

그의 유해는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안장되었으며, 심우장은 지금도 독립운동의 상징 공간으로 남아 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이후 그의 시는 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님의 침묵』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승려이자 철학자로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졌지만, 그 핵심에는 늘 '자유와 정의'가 있었다. 그는 고요히 세상을 울리는 사람, 격정 속에서 침묵으로 외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저항이 아닌,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영혼의 힘이었다.

오늘날 그의 시와 삶은 여전히 읽히고 있으며, 억압된 시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의 표본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언어와 침묵 속에서, 진정한 저항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한용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깨어나고 있다.

이역시 나라를 님에 빗대어 쓴시 복종이다.
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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