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년 ~ 412년 음력 10월) 광개토왕(廣開土王)은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으로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담덕, 위대한 왕이 되다
서기 374년, 고구려의 태왕 고국양왕의 아들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담덕이었다. 담덕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씩씩했으며, 무예뿐 아니라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백성을 이롭게 하지 않는 배움은 허망하다’는 말을 늘 가슴에 새겼다. 그는 장차 나라를 지킬 큰 뜻을 품고 자라났다.
당시의 고구려는 안팎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며 끊임없이 국경을 위협했고,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연나라가(전연)가 저족의 전진한테 잠깐 멸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후연) 요동과 화북을 휩쓸었다. 담덕은 어린 나이였지만, 전쟁터에서 아버지를 따라 병사들과 함께 지내며 백성의 고통과 두려움을 직접 체험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힘없는 나라에 백성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서기384년 11월 큰아버지인 소수림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소수림왕의 동생이자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즉위했다. 이에 따라 담덕은 그로부터 2년 뒤 고국양왕 3년에 12세에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기 391년, 6년뒤 고국양왕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담덕은 겨우 18세의 나이로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이른 나이의 등극이었다. 사람들은 어린 태왕을 걱정했지만, 담덕은 곧바로 왕권을 강화하고 군을 재정비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신하들에게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이 나라는 이제 내가 지킨다. 백성의 피눈물을 더는 보지 않게 하겠다.”
첫 번째 군사 행동은 백제를 향한 공격이었다. 백제는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고 남하 정책을 펼치며 도발을 멈추지 않았고, 담덕은 이에 강력히 대응하였다. 그는 정예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남진하였고, 한성 근처까지 진격하여 백제의 왕성을 위협하였다. 특히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 병사들이 온몸으로 싸워 승리를 이끌었다.
전투가 끝난 뒤, 담덕은 무거운 마음으로 부상병들이 누운 진영을 찾았다. 피범벅이 된 병사의 손을 꼭 잡은 그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너희 덕분에 고구려가 숨 쉬고 있다. 내가 반드시 이 피를 잊지 않겠다.” 이 말은 훗날 병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고, 그날 이후 장병들은 ‘태왕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며 싸움터로 향하였다.
담덕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늘 백성을 중심에 두고 정치를 펼쳤다. 전쟁터에서도 약탈을 금지하고, 포로가 된 백성들을 직접 돌보며 그들의 생계까지 살폈다. 어떤 마을에서는 병사들이 밀가루를 요구하자, 담덕은 그 즉시 군량을 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백성의 것을 빼앗으면 왕이 아니다. 주는 자가 왕이다.”
그는 또한 북방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성곽을 보수하고, 국경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등 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 담덕은 수시로 변방을 순시하며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백성들의 삶을 귀담아 들었다. 이러한 태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태왕을 ‘아버지 같은 임금’이라 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담덕은 신라의 요청으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남방 원정을 준비하였다. 그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형제의 나라가 고통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등을 돌릴 수 없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 간의 새로운 외교적 전환점이 되었고, 훗날 한반도의 균형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이라는 칭호는 훗날 붙여졌지만, 그 이름에는 담덕이 이룬 영광과 사랑이 담겨 있다. 그는 단지 땅을 넓힌 왕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품은 지도자였다.
광개토대왕 – 영토의 주인, 마음의 왕
서기 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략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신라왕은 고구려에 급히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많은 신하들이 ‘남의 일에 군사를 내보내는 것은 어리석다’며 만류하였지만, 담덕은 단호히 명령을 내렸다. “신라가 무너지면 고구려의 등 뒤가 무너진다. 지금 돕지 않으면 내일은 우리가 울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광개토대왕은 정예병 5만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왜구를 몰아내며 신라의 경주까지 진격하였고, 신라는 이를 계기로 고구려에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되었다. 이후 신라는 광개토대왕에게 영토 일부를 헌납하고, 오랫동안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된다.
담덕은 고구려의 영광을 한반도 남부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는 북방으로 눈을 돌려 만주와 연해주까지 진출하였다. 특히 후연과의 전쟁에서는 뛰어난 기병전술과 정보전을 활용하여 수만의 적군을 무찌르고, 요동과 요서를 점령하였다. 이 승리는 고구려가 중원의 강국으로 인정받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정복은 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담덕은 병사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의 백성들에게 ‘세금은 1년 유예, 약탈은 금지’라는 엄명을 내렸다. 어느 날, 한 병사가 굶주림에 못 이겨 농가의 닭을 훔쳐 먹은 사건이 있었다. 담덕은 병사를 엄중히 벌하고, 농가에는 쌀과 소금을 직접 내렸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땅만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지에 도로를 닦고, 요새를 짓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병사들에게는 농번기에는 집으로 돌아가 논을 일구도록 명령하였고, 가족을 돌보는 것도 ‘국가 수호’의 일환이라 여겼다. 이러한 인간적인 리더십은 백성과 병사들의 절대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장수왕에게 맡기는 고구려의미래
서기 413년, 담덕은 병을 얻어 침상에 누웠다. 그는 마지막까지 국정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아들 장수에게 고구려의 미래를 맡기며 유언을 남겼다. “나는 내 목숨보다 백성을 사랑하였다. 너는 땅보다 사람을 먼저 품어라. 그래야 이 나라가 오래간다.” 그 말은 후에 장수왕의 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가 서거하자, 온 고구려는 슬픔에 잠겼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흙을 퍼 날라 무덤을 세웠고, 수많은 병사들은 ‘왕의 무덤을 지키겠다’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무려 높이 6.39m에 이르며, 고구려의 역사를 빛낸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비문에는 담덕의 업적과 인품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후대의 사람들은 그 비석을 읽으며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왕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말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진하게 전해졌다. 특히 담덕이 병사와 백성들의 이름까지 기록에 남기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는, 그가 단 한 사람도 잊지 않으려 했던 왕이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실로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 담덕은 영토를 가장 넓힌 정복자였지만, 백성의 눈물을 가장 먼저 닦은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땅 위에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위에 나라를 세운 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고구려의 왕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마음의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