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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

by 황금냥진콩 2025. 8. 1.

위안부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
김순덕할머니

 

김순덕 (1921.5.26~2004.6.30)

대한민국의 활동가이자 화가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위안부여성으로서 겪은 삶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묘사

1937년 위안부에 강제동원되어 중국에서 3년간 머무르다 1940년 일본장교의 도움으로 귀국하였다 김덕진이란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김덕진은 똑똑하며 외모도 준수하여 난징으로 건너가 계급이 높은 고위장교들을 상대하였고  50대 일본군 고위장교인 이즈미와 친밀한 사이가 되고 1940년 이즈미의 도움과 관심덕에 다른 여성 4명과 함께 위안소를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이즈미는 현금 100엔과 함께 기차등에서 검문을 통화할 수 있는 귀향증을 만들어주었고 1940년 4월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즈미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6,25 전쟁 중 편지는 모두 소실되었고 서울에서 대한민국 철도청직원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후 평생 위안부피해의 후유증으로 방광염 자궁병 정신불안등의 지병에 시달렸다. (네이버 위키백과 참고 )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끌려감

침묵을 찢고 앉은 증언자, 김순덕 할머니 

열세 살, 지워진 소녀의 이름

김순덕 할머니는 192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하고 평범한 농가의 딸로, 들꽃처럼 조용히 자라던 소녀였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그녀의 삶은 무너졌다. 1937년 한 조선인남자가 일본공장에서 일할 여자들을 모집해 일본에 가기로 했다며 공장에 돈 벌러 가는 줄 알았다며 위험한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하였다.  30여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일본 나가사키라는 이야기도 있음)로 넘어갔다. 이후   난징을 거쳐 1940년까지 3년간  위안부 피해를 당하였다.

몸이 아닌 영혼이 부서진 시간

도망치고 싶어도 낯선 나라에서 어디가 어딘지를 몰라서 도저히 도망을 칠 수가 없었고 위안부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강물이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려고도 했지만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할머니는 3년간 위안부로 있다가 20살에  일본군인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막상 집에오니 사는 것도 너무 가난하고 왠지 이웃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것 같아 혼자 속앓이만 하다 서울로 상경 후 남편을 만나 아들 둘 딸하나를 낳았으나 6.25 전쟁 때 딸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육성인터뷰에서는 아들넷을 낳았으나 한 명이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보기만해도 마음아픈 그림이다..
그림수업을통해 전시까지했던 김순덕할머니의 끌려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못다핀꽃의 제목이기도 한 김순덕 할머니의그림
못다핀꽃

 

용기 내어 입을 열다

1992년,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시작  김순덕 할머니는 용기를 내어 위안부 피해를 고백  그 과정에서 작은아들과 며느리가 크게 실망해 또 다른 아픔이 있었다고 할머니는 이야기했다..” 그녀의 증언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한 사람으로 등록되었고, 이후 기자회견, 국회 증언, 유엔 보고서에도 참여하게 된다. 수십 년간 가슴에 묻어온 고통을 마침내 꺼낸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던진 가장 뜨거운 침묵의 파문이었다.

 

끝나지 않은 싸움

증언 이후 김순덕 할머니는 전국 곳곳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얼굴이 되었다. 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에도 참석했고, 고등학생들 앞에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분노보다는, 이해를 요청하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복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합니다.” 그녀의 이 말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고, 법적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김순덕 할머니는 조용히 한 걸음 한 걸음 그 길을 걸었다.

아프게 지켜보는 세상

세상은 그녀의 상처를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한때는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도, 점차 그녀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았다. 여러 다큐멘터리와 전시회, 연극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재조명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김순덕 할머니는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들은  피해자이자, 증언자이자, 역사의 지킴이였다. 아프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남겨진 자리, 이어지는 외침

2004년, 김순덕 할머니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소박했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수많은 시민과 활동가들이 모여 함께 울었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매주 수요일이면 여전히 소녀상 앞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소녀상옆 빈자리에는 김순덕 할머니 그리고 다른 위안부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 소녀상은 이제  그 수천 명의 피해자 소녀들의 이름을 대신한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소녀상의 의미를 아시나요?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

 

꽉쥔주먹  일본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어깨 위에 작은 새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자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빈 의자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의 빈자리 우리가 소녀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공간

 

맨발과 발꿈치가 들려있는 모습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발을 빼앗긴 것과 고향에 돌아와도 편히 정착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설움 

 

할머니형상의 그림자 오랜 시간 풀리지 않는 한과 가슴앎이 

 

그림자안의 나비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 바라는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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