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덕성을 함께 지닌 여인
1504년
강릉 외가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본명 신인선, 사임당은 그녀의 호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그녀는 당대 드물게 부친에게서 유학과 한문, 시서화 등 모든 학문을 교육받을 수 있었다. 특히 외할아버지 집에는 고서와 명화, 문방사우가 가득했으며, 신사임당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시와 그림, 자수를 익히며 예술혼을 키워갔다. 열두 살에 지은 시와 그린 포도 그림은 이미 어른들 사이에서 감탄을 자아냈고, 한문도 능숙히 구사해 부친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글을 배울 정도였다. ‘여자이지만 문장과 덕성은 군자에 가깝다’는 평이 따랐다.
시어머니를 위해 바느질한 밤
열일곱에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와 결혼한 그녀는 한 번도 시댁살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특히 시어머니가 병에 걸렸을 때, 그녀는 친정의 명화와 고서들을 모두 정리해 시댁으로 옮기고, 밤마다 손수 바느질로 침구를 만들어드렸다. 밤이 깊어 눈을 쉬지 못하고 실을 꿰던 그녀의 손은 피로 얼룩지기도 했지만, 그녀는 “시어머니는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라며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정성은 시댁 전체에 감동을 주었고, 이후 신사임당은 ‘예의와 효의 본보기’로 알려지게 된다.
어머니이자 스승이 된 삶
신사임당은 총 여섯 자녀를 두었고, 그 가운데 넷째가 바로 율곡 이이다. 그녀는 자녀 교육을 단순한 훈계가 아닌, 삶 속 실천으로 일러주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몸을 닦고 방을 정돈하게 했고, 식사 전에는 조용히 감사 인사를 드리게 했다. 글을 가르칠 때는 억지로 외우게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글자와 마음이 함께 움직이도록 도왔다. 율곡 이이는 훗날 조정에 나아가 “나의 마음공부는 어머니 무릎 아래에서 시작되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여성의 지위가 낮던 시절에도, 자녀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림과 시로 남긴 조선의 풍경
신사임당은 여성이자 어머니였지만, 동시에 조선이 낳은 최고의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풀벌레 그림, 수묵 포도도, 산수화, 초충도는 자연을 섬세하게 담아낸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때는 조정에 올려진 그녀의 그림을 보고 중종이 “이토록 맑고 조화로운 그림을 누가 그렸는가”라며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녀의 시는 한문과 한글 모두에 능숙했고, 감정과 철학이 함께 녹아 있어 선비들에게도 존경받았다. 그녀는 예술을 단순한 재주로 보지 않았고, 그것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세상을 가꾸고자 했다.
가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품격
신사임당의 삶은 풍요롭지 않았다. 남편 이원수는 학문에는 뜻이 있었지만 현실에는 무력했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집안을 돌보는 데 서툴렀다. 시댁의 재산은 빠르게 기울었고, 신사임당은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손수 베를 짜고 자수를 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난은 마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이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하며 항상 단정하고 평온한 자세를 유지했다. 벽지에 글귀를 써 붙이고, 자녀들이 서로 예를 갖추게 하며, 매일 책과 그림을 가까이 두게 했다. 그녀의 집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크고 깊은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
율곡 이이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
신사임당이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마흔을 넘긴 무렵이었다. 자녀들이 아직 어린 나이였고, 율곡 이이는 열두 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어린 아들을 곁에 앉히고 조용히 당부했다. “너는 크게 될 아이니,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고, 형제들을 항상 이끌어라. 가장 높은 자리에 서더라도 백성의 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이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고, 훗날 평생 단 한 번도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독서를 시작했고,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조선 최고의 정치가가 되었다. 율곡의 바탕에는 신사임당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놓여 있었다.
예술보다 깊었던 마음
신사임당은 단순한 ‘현모양처’가 아니었다. 그녀는 시대가 요구한 책임을 감당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삶을 잃지 않은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글에는 삶의 통찰이, 그림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가 담겨 있었고, 그녀의 삶에는 여성이자 인간으로서의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조선 후기 여성 중 누구도 그녀만큼 문과 예, 그리고 덕을 함께 갖춘 이가 드물었다. 그녀는 침묵으로 가르쳤고, 손끝으로 세상을 바꾸었으며, 아이들 곁에서 조용히 민심과 천심을 일깨웠다.
조선 여성의 빛이 되다
1551년, 그녀는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강릉과 한양, 모든 지식인 사회는 슬픔에 잠겼고, 문인과 선비들은 그녀의 유작을 모아 시문집으로 남기려 했다. 그녀의 무덤 앞에는 “어질고 지혜로운 이는 죽어도 향기를 남긴다”는 묘비명이 새겨졌다. 오늘날 그녀의 이름은 화폐 속 인물로, 교과서 속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이 우리 마음속에는 ‘정갈하고 곧은 어머니의 상’으로 살아 있다.
신사임당. 그녀는 여성이 할 수 없던 시대에,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가장 강한 가르침을 남겼다. 어머니, 예술가, 사상가, 그리고 사람. 그녀는 그 모든 이름이 어울리는 단 한 사람이었다.
내면의 아름다움 올곧음의 대명사 신사임당을 최고의 현모양처로 기리는 사람이 많지만 필자는 최고의 여성예인으로 먼저 생각한다. 지금 시대에 그녀가 있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었을지 너무나도 설렐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