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농사는 백성의 삶 그 자체였다. 하지만 비는 마음대로 내리지 않았고, 가뭄과 홍수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당시엔 비가 얼마나 오는지 정확히 아는 방법조차 없었고, 하늘의 뜻을 점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절박한 현실 속에서, 한 사람은 하늘을 숫자로 기록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장영실이었다.
세종은 언제나 백성의 삶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는 장영실에게 말했다. “하늘이 내리는 물도 사람이 기록할 수는 없을까?” 이 질문은 곧 명령이 되었고, 장영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과 창의력을 그 질문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측우기'였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원통 모양의 그릇, 일정한 깊이와 지름을 가진 그 용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받아 정확히 몇 '치'나 내렸는지를 측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뜻’이라 여겨졌던 자연을 ‘사람의 언어’로 해석해 낸 첫 도전이었다.
측우기는 한양뿐 아니라 전국 각 고을에도 배치되었고, 관리는 비가 내릴 때마다 측우기에 담긴 빗물을 측정하여 보고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가뭄이나 홍수의 가능성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었고, 농사의 적기와 예측이 훨씬 정확해졌다. 무엇보다, 백성은 이제 하늘의 재앙 앞에서 조금은 덜 무력해졌다.
장영실은 측우기를 단지 '측정도구'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과학으로 백성의 삶을 보호하려 했다. 그 마음은 측우기라는 작지만 위대한 도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종은 그를 치하하며 말했다. “그대는 이제 하늘의 기록자요, 백성의 방패다.” 이 말은 장영실에게 주어진 최고의 칭호였다. 그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을 측정한 자였다.
측우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강우량 측정기구로 평가되며, 당시 조선의 과학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발명은 단지 기술의 발전이 아닌, 사람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영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측우기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도 모를 백성의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장영실의 위대함이었다.
작은 도구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측우기는 빗물을 담는 그릇이었지만, 동시에 백성의 눈물을 막아주는 방패였다. 기술은 사람을 향할 때 가장 빛난다. 지금의 우리도, 기술을 만들거나 쓰는 그 순간마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잊지 않아야 한다.
장영실, 시간의 얼굴을 만들다 앙부일구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그것은 오직 양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었다. 해의 높이를 보고 짐작하거나, 종을 치는 시각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누군가의 시간’이었지, 백성의 시간은 아니었다.
세종은 그 점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같은 하늘 아래 시간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나라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종은 장영실에게 말했다. “백성이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라.”
장영실은 고민했다. 시간을 보는 것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방식이 아닌,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처음으로 ‘백성을 위한 해시계’로 만들었다. 그 이름은 ‘앙부일구(仰釜日晷)’였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시간을 잰다는 뜻이었다.
앙부일구는 반구형 해시계다. 마치 솥을 엎은 듯한 모양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 그림자가 가리키는 선이 바로 시간이다. 이 시계는 당시 종묘나 관아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설치되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누구나 쓸 수 있게.
그것은 단순한 시간 측정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공유하자’는 철학이었고, ‘정보의 민주화’였다. 앙부일구는 계절에 따라 기울기를 달리했고, 양각된 눈금들은 해가 뜨고 지는 움직임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해 주었다. 글을 모르는 이들도 그림자를 따라 시간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장영실은 이 앙부일구를 통해 ‘과학이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아닌, 아래에서부터 자라나는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세종은 그러한 철학을 끝까지 믿고 실현해 주었다.
앙부일구는 지금도 존재한다. 창덕궁, 종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고물의 형상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가 백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그 모든 영광 뒤엔 장영실의 손길이 있었다. 그는 이름 없이 사라졌고, 신분은 끝내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시간만큼은, 그가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고 여전히 흐르고 있다.
진짜 기술은 사람을 위할 때, 빛난다. 앙부일구는 위대한 과학이지만 동시에 따뜻한 마음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 ‘시간’을 나누고 있을까? 장영실처럼, 누군가의 하루를 더 나아지게 할 ‘시간의 얼굴’을 만들 수 있을까? 과학도, 마음도, 결국은 ‘공유’에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