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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가난한 바보 대통령 내마음속 하나뿐인 진정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님을 그리워하며 ...

by 황금냥진콩 2025. 7. 31.

정의로운 바보 노무현대통령님을 추모하며

노무현 대통령님(1946.9.1~2009.5.23)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판사로 재직 후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3,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대중 정부에서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 막노동을 하며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정치적으로 친인척및 측근비리 정책의 실패등 민생경제파탄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적 인기가 부족했다는 대통령으로 회자되지만, 필자의 경우 썩은 엘리트들의 중상모략으로 안타까운 결과를 낳은 부분이라 확신할 수 있다.  어서 정권 시스템이 바뀌기만을  교체되기를 평생 희망했는데 이제야 이재명대통령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글을 쓰면 편파적이라고 사람들이 욕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몇억 들여 세금으로 개수영장 짓는 것보다 낮다고 100번이고 생각한다. 10년만 지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겠다면 할 수 없다  가서 수영장 짓는 거나 거짓말하는 거 도와주라고 할 수밖에 이들이 탕진한 세금들은 편드는 너희가 메꾸는 방법이 있다. 그럼 좀 더 당당하게 편들 수 있을 것이야.) 
지금 권력을 잡고있는 엘리트 무리들이나 친일파들이 얼마나 뼛속깊이 썩어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파든 좌파든 모르고 필요 없다 이것저것 뒤로뻬돌리고 댓글부대 만들어 중상모략 하는 등 정말 소중하게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 (이태원참사, 무안공항등 말도 안 되는 참상이나 마약의 대중화, 가짜뉴스 등 흉기난동  총 제작? 이런 말 같지 않은 일들을 벌이는 것을)을 모르는척하는 정권보다는 우리는 그냥 멀쩡한 사상을 가진 인간 대통령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리고 검찰조사에서 아내가 아닌 노무현이 자녀를 위해 직접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둥 조카사위연철호에게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는 둥 640만 달러의 의혹 때문에 대통령이 투신자살 했다 하였는데  이런 해프닝자체가 말이 되는가 싶다.   자살 도 너무 의심스럽고 검찰의 조작도 너무 의심스럽다 그렇게 괴롭힘 당해서 퇴임한 대통령이 무슨 괴롭힘을 받으려고 그 돈을 받았겠냐고.. 요구하겠냐고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 생각하냐고...   우리 머리는 장식인지 알고 있는 인간들이다. 

(네이버에 노무현만 치면 나온다 일베 에서 비하하고 조롱했던 대통령의 모습들이.... 이래도 입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댓글창 활짝 열어두겠다. )

가난한 소년, 정의를 품다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난했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농사일과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아버지는 대장간을 운영했으나 수입은 넉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억척스럽게 일했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도 노무현은 학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는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군 제대 후, 그는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도전했고,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고졸 출신으로는 극히 드문 일이었고, 언론에서도 크게 주목한 사건이었다. 이후 197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을 주로 맡았지만, 1981년 그는 한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부림사건이었다. 당시 부산의 노동자, 학생들이 불법 시위를 했다는 혐의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사건이었다. 변호인단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노무현은 이들의 변호를 자청했다. 그는 피고인들의 인권 침해와 고문 사실을 조목조목 밝혔고, 법정에서 소신 있는 변론을 이어갔다.

부림사건은 단순한 법적 쟁점이 아닌,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꾼 전환점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고, 이후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의 사무실은 언제나 노동자, 서민, 학생들로 붐볐고, 그는 돈보다 원칙을 우선시하는 변호사로 알려졌다.

1988년, 그는 평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계 입문 초기부터 그는 ‘말 잘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안기부 예산의 불투명성, 재벌과 권력의 유착 등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5공 청문회에서 보여준 논리적인 질문과 당당한 태도는 국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고,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정치를 대하는 태도는 기존의 정치인들과 달랐다. 그는 타협보다는 원칙을, 계산보다는 신념을 우선했다. 그로 인해 당내에서도 여러 번 갈등을 겪었고, 지역주의의 벽 앞에서는 연이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 민주당계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은 사실상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지역주의를 깨자”는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한 감동적인 일화는, 1992년 총선 낙선 직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정치판 떠나라”는 조롱을 들으며 정치적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지역구를 돌며 주민들의 손을 잡고 “미안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고개 숙였다. 그 진심 어린 태도에 몇몇 주민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는 그 마음을 가슴에 품고, 더 단단해져 돌아왔다.

그의 정치 인생은 실패의 연속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실패들은 그를 더 깊고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원칙을 꺾지 않았고,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이상을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노무현은 그렇게, 누구보다 사람다운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보라 불린 정치인

2002년,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은 기적에 가까웠다. 유력 후보였던 이인제, 한화갑 등 경쟁한 정치인들을 제치고,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예상을 뒤엎은 결과를 만든 것이다. 당시 노무현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부족했지만, ‘반지역주의’, ‘새 정치’라는 신념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지지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정치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2002년 대선에서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맞붙었다. 선거 막바지에는 노무현을 둘러싼 각종 의혹과 공격이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친 그의 진정성은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결국 12월 19일, 그는 48.9%의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청와대 입성 후, 노무현 대통령은 소신과 원칙을 앞세운 정치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열린 우리당 창당 이후에도 협치와 개혁 사이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는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신념 아래 대통령 권한마저 나눌 수 있다는 파격적인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그 진심은 국민에게 닿았고, 때로는 오해를 낳기도 했지만 흔들림 없는 자세로 국정에 임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투명성과 참여를 강조했다. 전자정부 시스템을 적극 도입했고,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반대세력의 견제는 거셌고, 언론과의 갈등은 임기 내내 이어졌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햇볕정책을 계승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정치 환경 속에서 그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퇴임 이후, 그는 권력을 놓은 순간에도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고자 했다. “성공한 대통령보다, 위대한 시민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봉하에서 그는 농사일을 하며 시민들과 자유롭게 소통했다. 아이들과 산책하며 웃던 그 모습은 권위에서 내려온 한 사람 노무현의 진정한 삶이었다.

(퇴임후에 그의 모습까지도 엄청나게 조롱하고 비하했다.. 괴롭힘도 가지가지 )

하지만 그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검찰 수사는 그의 일상을 무겁게 만들었다. 가족에 대한 조사, 측근들에 대한 수사는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고, 결국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결단을 내렸다. 2009년 5월 23일,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유서를 남기고 떠났다. 그날 대한민국은 울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봉하마을로 달려가 눈물을 흘렸고, 그의 진심을 뒤늦게 깨닫고 가슴을 쳤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철학이었다. 그는 권위보다 진심을 택했고, 타협보다 원칙을 고집했다. 비록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삶은 한국 정치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의 죽음 이후, 정치에 대한 국민의 자각과 참여는 오히려 더욱 깊어졌으며,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너무 앞서 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말과 행동은 진실이었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진심을 잃지 않았던 한 사람, 대통령 노무현. 그의 여정은 끝났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착한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무지했고.. 너무 휘둘렸다.  근데 이제는 어린아이들도 자기의 의견을 명확하게 펼치는 시대이다.  휩쓸리지말고 가짜뉴스에 선동되지 말고 대대손손 우리의 자녀들이 안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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