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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혁을꿈꾸던 선비 백성에대한 사랑을 목민심서로 정약용

by 황금냥진콩 2025. 7. 23.

조선의 개혁을꿈꾸던선비 백성에대한 사랑으로 목민심서를 만들다. 정약용
정약용님의 초상화

 

정약용(丁若鏞, 1762~1836 4.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이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3]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젊은 선비

1762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난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개혁가였다.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로 학문과 청빈한 삶을 중시했으며, 어린 정약용은 일찍부터 유교 경전을 익히며 총명함을 드러냈다. 15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8세엔 성균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유학적 관념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았고,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실사구시의 철학을 품기 시작했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의 다짐

 

정약용이 22세 되던 해, 부친 정재원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아버지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와 백성들과 함께 농사짓던 인물이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친 뒤, 정약용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절을 올렸다. 그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처럼 백성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고, 이 말은 평생 그의 삶을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다. 훗날 그는 수많은 책을 쓰고 개혁 정책을 제안하면서도 늘 “백성의 살림살이가 곧 정치의 거울”이라 말하곤 했다.

 

정조와의 만남, 개혁의 첫걸음

 

1789년, 과거 시험에 급제한 정약용은 마침내 중앙 관직에 진출한다. 그를 눈여겨본 이는 바로 개혁군주 정조였다. 정조는 그의 글재주와 깊은 사상에 감탄하며, 스승처럼 가까이 두었다. 특히 수원 화성 축조 당시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벽의 설계와 수차(水車) 제작을 맡겼고, 정약용은 과학과 수학을 접목시킨 독창적인 설계로 이를 완수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성과가 아닌, “백성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기계”라는 철학이 담긴 결과였다. 이 공적으로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얻어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된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개혁 문서를 작성하며 조선의 개혁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실학, 현실을 바꾸는 학문

 

정약용의 학문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는 토지 제도 개혁, 부세 개편, 노비 폐지 등을 제안하며 현실 문제에 깊이 뛰어들었다. 특히 그의 ‘여전론’은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노동을 나누어 공정하게 분배하자는 구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그는 “정치는 백성을 위하는 도구이지, 지배자의 장식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수령과 관료의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하지만 이런 그의 개혁안은 양반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를 둘러싼 정치적 긴장은 고조되어 갔다.

 

형제의 고난, 그리고 긴 유배의 시작

 

1801년, 순조 즉위 이후 노론 벽파가 집권하면서, 남인 계열의 정약용은 정치적 표적이 된다. 특히 그의 가문이 천주교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형 정약전과 함께 박해를 받는다. 결국 그는 40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강진으로 향한다. 그 여정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라가 나를 버렸어도, 나는 나라를 포기하지 않는다.” 강진에서 그는 스스로 논밭을 일구고,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조용히 삶을 이어간다. 유배 초기, 하루 세끼를 해결하기조차 어려웠지만, 한 어촌 부부가 그를 숨겨주고 음식을 나누었다. 그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훗날 ‘목민심서’를 이들 농민에게 헌정했다고 전해진다.

 

눈물로 써 내려간 목민심서

 

강진 유배 10년째 되던 해, 정약용은 48세의 나이에 ‘목민심서’ 집필을 시작한다. 이는 단지 지방관의 도리를 정리한 책이 아니라, 백성에 대한 사랑과 통치자의 책임을 담은 삶의 철학이었다. 그는 눈이 침침한 가운데, 촛불 대신 낮은 햇빛을 따라가며 수천 자의 글을 써 내려갔다. 하루 종일 밥도 잊은 채 붓을 든 채 앉아 있다가 이웃 아주머니가 챙겨준 죽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며 “내가 다시는 백성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백성은 부모를 잃은 아이와 같다. 고을 수령은 그들의 어버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백성을 향한 통치의 원형을 제시했다.

 

귀향 후 마지막 학문과 제자 양성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벼슬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 마재(남양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평생의 저술을 마무리했다.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실용학문을 가르치며 “글은 배워서 써야 하고, 학문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의 제자 황상, 이기양 등은 훗날 근대 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경세유표’, ‘흠흠신서’, ‘언론’, ‘예설’ 등 수많은 책을 완성하며, 실학의 거목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저서는 정치, 법률, 경제, 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했고,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죽음과 함께 남긴 가장 따뜻한 유산

 

1836년, 정약용은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생전에 그는 자식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지 않았지만, 하나의 유언을 남겼다. “글을 써라. 그리고 너희도 백성에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그의 무덤은 남양주의 한 야산에 조용히 자리해 있다. 매년 그의 생일이면 제자들의 후손들이 찾아와 그의 시를 낭송하고, ‘경세유표’를 펼쳐 읽는다고 한다. 정약용의 이름은 이제 단순한 학자를 넘어, 시대를 움직인 사상가로 기억된다.

오늘날도 정약용의 정신은 살아 있다. 권력을 비판하고, 백성을 품고, 실용의 학문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 사람. 그는 조선의 구조를 바꾸려 한 개혁자였고, 사랑을 글로 남긴 선비였다. 정약용, 그 이름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거울로 반짝인다.

 

정치를 평화롭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욕심 없이 순수하게 무리를 위해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를 찾기는 어려운 일일까?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너무 나도 힘들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럼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나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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