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 (1758.4.8~1816.6.30)
조선후기의 문관, 실학자, 저술가, 생물학자 정약현의 동생이며 정약종, 정약용의 형이다. (정약현, 정약종 또한 우리나라천주교에서 유명한 가톨릭신자들이다)
1801년에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조차사위인 황사영의 백서 신건으로 흑산도로 이배 되었다. 유배생활을 하며 서당을지어 섬아이들을 가르쳤고
흑산도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어류를 직접 관찰하고 연구하여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 《자산어보》, 조선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전사의》, 흑산도 홍어 상인 문순득의 표류기인 《표해시부》 등을 남겼다.
조선의 바다를 품은 학자, 정약전
정약용의 형, 그러나 스스로 빛난 사람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더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형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형이라는 이유로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다. 정약전은 시대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유배지에서 오히려 새로운 삶의 가치를 피워낸 사람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를 믿은 죄로 신유박해 때 유배되었고, 그 끝에서 바다 생물학의 금자탑을 세운다. 정약전은 고립된 땅, 흑산도에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의 삶을 기록하고 돕는 학자의 자세를 끝까지 지켜낸 인물이었다.
신유박해와 흑산도 유배
1801년, 조선에서는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다. 이른바 ‘신유박해’는 조선 후기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당시 남인 가문이었던 정약전 형제들은 천주교를 접하고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는 곧 정치적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그 결과, 정약전은 전라도 끝자락, 외진 섬인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흑산도는 척박하고 외딴 땅이었으며, 조정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가 곧 내가 연구할 땅”이라 말하며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섬사람들과 함께한 삶
정약전은 흑산도에 도착하자마자 섬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그들의 언어와 생활을 관찰했고, 바다에서 얻는 생물들에 주목했다. 당시 어민들은 잡은 생선을 팔기보다는 그날그날 살아가는 데 급급했으며, 지식의 부재로 인해 많은 생물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버리는 일도 많았다. 정약전은 백성들의 생활 속 문제를 기록하고, 보다 나은 삶의 방향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흑산도의 뱃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바닷말과 풍습, 어획법까지 배우며 학문을 넓혔다.
『자산어보』의 시작
정약전은 유배 중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흑산도의 물고기와 해산물, 해초, 조개 등 다양한 바다 생물을 관찰하고, 이름과 특징, 서식지, 조리법까지 정리하였다. 이렇게 정리된 책이 바로 『자산어보(玆山魚譜)』이다. 자산은 흑산도의 다른 이름이며, 어보는 ‘물고기에 관한 기록’을 뜻한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적 지식만 담은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연결된 실용서로 구성되어 있다. 한자로 쓰였지만 어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되었고, 조선 최초의 어류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한 가치를 지닌다.
어린 어민 창대와의 만남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한 어린 어민 ‘창대’를 만나게 된다. 창대는 배운 글자도 없고 험한 바닷일만 해온 아이였지만, 정약전은 그 안에서 순수한 호기심을 발견하였다. 그는 창대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함께 물고기를 잡고 해안선을 돌며 관찰을 기록하였다. 『자산어보』의 많은 정보는 창대와의 동행 덕분에 가능했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가르쳤고, 창대는 어민의 눈으로 바다를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며 만들어낸 기록은 단순한 지식을 넘은, **백성과 함께한 진짜 학문의 결실**이었다.
섬에서의 기록, 세상을 향한 목소리
정약전이 남긴 『자산어보』는 그저 유배지의 한가로운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실용적 지식의 총체였고, 조선 바다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관찰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는 물고기의 생태와 생김새, 조리법까지 적어내며 어민들이 바다 생물을 더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민간에서 구전되던 바다 생물에 대한 이름과 용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대 연구자들에게도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처럼 유배라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진정한 학자의 자세로 백성과 자연을 품었다.
자산어보의 역사적 의의
『자산어보』는 이후 정약용이 흠모하고 언급할 만큼 가치 있는 저작이었다. 정약용은 동생의 『목민심서』와는 다르게 형 정약전의 글에서 실천적 지혜와 따뜻한 민중의식을 읽었다. 더욱이 이 책은 조선 생물학과 어류학의 기초가 되었고, 현대에서도 생물연구나 민속학 자료로 꾸준히 인용된다. 흑산도라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실용 지식을 민중과 함께 나눈 실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산어보는 그 어떤 정치적 논문보다도 진중하고 감동적인 유산이다.
창대의 손으로 다시 열린 책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뒤, (1817년(순조 16년), 유배 16년 만에 내 흑산 우이도(牛耳島)에서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흑산도 주민들과 그의 제자 창대는 그가 남긴 원고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몇 년 후, 어느 관청에서 흑산도를 들른 관리가 이 원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조정에까지 전달되었다. 창대는 떠난 스승을 대신해 그 책의 의미를 설명했고, “이 책은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책”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는 관료들의 심금을 울렸고, 책은 조선 중 후기 학문사에서 정식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한 아이와 한 선비의 만남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이어졌다.
진정한 학자란 무엇인가
정약전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고립된 섬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았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지식을 나누었다.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의 혼란 속에서도, 한 인간이 어떻게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정약전을 통해 알 수 있다. 학문이란 백성을 위할 때 가장 빛나고, 고통의 땅에서도 진심으로 쓴 기록은 결국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바다를 향한 마음은 오늘날까지 파도처럼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