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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희망 조용한 실천자 최재형

by 황금냥진콩 202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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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독립운동에 수백억 전재산을 바친 독립운동의 대부

 

 

조선인의 희망 조용한 실천자 최재형

최재형(崔在衡)·최도헌(崔都憲)이며,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1860.8.15~1920.4.5)

조선후기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러시아제국의 군인 

 

조선인의 희망 숨은 영웅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구한말 조선인의 희망이었던 자선가이며 애국지사였다. 그는 조선이 가장 어두웠던 시절, 러시아 연해주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며 이름도 남기지 않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다.

는 함경도 경원에서 가난한 노비 출신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았지만, 어린 나이부터 총명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아이였다. 가족과 함께 굶주림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 사회에서 성공하여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노동으로 신뢰를 얻었고, 탁월한 언어 습득 능력과 사업 수완으로 철도 회사와 제재소 등을 운영하며 큰 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부를 사리사욕에 쓰지 않았다. 조선인이면 누구든 배고프거나 병들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왔다. 특히 교육에 뜻을 두어 수많은 조선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최재형 선생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자 쉼터였으며, 거처는 ‘의병들의 집’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자택에 수십 명의 의병과 유학생을 머무르게 하며 의식주를 해결해 주었다. 안중근 의사, 이범윤 장군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집에서 머물며 힘을 길렀고, 최재형은 그들을 뒤에서 말없이 지원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당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활동할 때, 최재형은 그에게 자금과 정보를 지원한 핵심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의거가 성공한 뒤, "최재형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한마디는 최재형이 얼마나 조용히 그리고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는지를 보여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한 그는,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기를 조달하며,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였다. 그는 단순한 후원자를 넘어서 전략가이자 조직가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권업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일제의 눈엣가시였고, 점점 그를 향한 위협이 가까워져 왔다.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인물로서 그는 일본 헌병들의 표적이 되었고, 끝내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고문과 심문이 이어졌고, 최재형은 끝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그는 생전 끝까지 "내 한 몸은 조선을 위함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순국 소식은 연해주와 조선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시 다지게 되었다. 그는 무기를 들고 싸운 전사도, 연설을 한 지도자도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키운 조선의 숨은 영웅이었다.

조용한 독립운동 실천자 

최재형 선생의 삶은 단순히 독립운동 후원자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교육, 언론, 문화 각 방면에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에도 앞장섰다.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신문을 창간했으며, 이를 통해 러시아 내 조선인들에게 조국의 현실과 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렸다. 그는 글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고, 동시에 신문 수익을 다시 독립운동에 재투자하였다.

그의 활동은 철저히 ‘조용한 실천’이었다. 그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고,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도 거부하였다. 사람들에게 “나라가 없으면 부도, 가족도, 생명도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며, 언제나 조국을 최우선에 두었다. 이웃 조선인들에게는 늘 따뜻했지만, 일제의 압박 앞에서는 누구보다 단호하고 비타협적이었다.

최재형 선생의 가장 감동적인 사연 중 하나는, 자신이 운영하던 제재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 중 가난한 이들의 가족에게 월급 전액을 익명으로 송금한 사건이다. 그들은 자신의 임금이 사라진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선생이 대신 지불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뒤늦게 알려졌고, 연해주 조선인 사회는 깊은 감동에 젖었다.

그는 조선인의 자긍심을 되살리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기회 제공’을 선택하였다. 단지 돈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기회, 머무를 수 있는 집,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데 힘썼다. 그에게 있어 독립은 총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1920년, 일본군이 연해주로 진출하며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시기에 최재형 선생은 끝내 체포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관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숨졌다. 시신조차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그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잊지 않았고, 훗날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그의 가족들 또한 조국을 위한 삶을 살았다. 아들 최광현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후손들 역시 연해주에서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그 정신을 지켜냈다. 최재형 선생의 이름은 긴 세월 동안 잊혔지만, 최근 들어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명예가 아닌 헌신으로, 앞이 아닌 뒤에서 조국을 받쳤던 사람이다. 우리가 ‘독립운동가’라 하면 흔히 무기를 든 이들을 떠올리지만, 진정한 독립은 그 뒤에서 수많은 사람을 묵묵히 도운 사람들에 의해 가능했다. 최재형 선생은 그런 인물이었다.

오늘날 그의 삶은 대한민국의 정신적 토대 중 하나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던 그의 삶은, 오히려 더 깊은 감동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조국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전형으로, 그는 후세에 ‘보이지 않는 등불’로 남아 있다.

진정한 영웅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최재형 선생은 말없이 조국을 받친 이 땅의 진정한 어른이자,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될 위대한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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