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1895.1.15~1971.3.11)
기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 사업가이자 유한양행의 창업주 겸 초대 회장
조선 청년, 미국 땅을 딛다
189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유일한은 가난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한 소년이었다. 그의 아버지 유기준은 기독교 선교사였으며, 유일한에게 늘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어린 유일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심 깊고 책임감 강한 아이로 자랐다. 1904년, 아홉 살이 되던 해, 그는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 부부의 주선으로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어린 소년이 태평양을 건너 낯선 땅에서 살아야 했다. 돈도, 보호자도 없이 시작된 미국 생활은 그야말로 고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유일한은 영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인종차별과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신문을 돌리고, 빵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영어를 익히고 수학을 공부했다. 점차 그는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마침내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미국 사회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지만, 유일한은 성실한 태도와 탁월한 성적으로 교수들의 신임을 얻으며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감동 실화: 심장병 어린이와 유일한의 눈물
그의 삶에는 남모를 따뜻한 일화도 많다. 유일한이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한창 경영하던 시기, 한 직원의 아이가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심장 수술은 국내에서 불가능해 미국으로 보내야만 했고, 비용은 수천 달러에 달했다. 대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유일한은 아무 말 없이 그 가족을 불러 “아이는 살려야지요. 걱정 마세요.”라며 자신의 사비로 모든 수술비와 체류비를 지원했다. 아이는 무사히 수술을 받고 건강하게 돌아왔다. 그 아이는 훗날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평생 유일한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 일은 유한양행 사내에서도 오랫동안 감동의 이야기로 전해졌다.
기업가의 길, 그러나 양심을 저버리지 않다
유일한은 1926년 미국의 템플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후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사람을 위한 기업’을 만들고자 했다. “우리 회사는 약을 팔기 전에 신뢰를 팔아야 합니다.”라는 말처럼, 그는 기업의 이윤보다 국민의 건강과 신뢰를 먼저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끝까지 지킨 신념, ‘무상 상속’이라는 선택
유일한이 경영한 유한양행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익을 자신의 사유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 말하며, 기업의 소유를 직원과 사회에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1969년, 그는 전 재산과 유한양행의 주식을 ‘유한재단’에 기부하였다. 사후에도 기업이 공익을 위해 쓰이도록 한 것이다. 자녀들에게 물려준 유산은 단 1원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기자가 “자녀들이 불만은 없었습니까?”라고 묻자, 유일한은 조용히 웃으며 “진짜 유산은 이름이고, 철학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요.”라고 답했다. 자녀들 또한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각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갔다.
병실에서의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유일한이 말년 암 투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에는 작은 흑백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신문을 읽는 대신 텔레비전을 통해 사회 흐름을 파악하며, 여전히 유한양행의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어느 날 간호사가 “이제 좀 쉬시죠.”라며 서류를 거두려 하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요. 기업은 나 없이도 돌아가야 해요.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회사를 걱정하던 그는 1971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병실의 유언장에는 단 한 줄이 남겨져 있었다. “내가 죽거든, 이 회사를 직원들에게 넘겨주세요.” 이 문장은 그의 모든 삶을 요약하는 철학이었다.
진정한 ‘대한민국 1호 기업가’
유일한은 한국 기업사에서 최초의 박사 학위 기업가였고, 최초로 직원지주제를 도입한 인물이었다.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이미 복지와 윤리를 기업 운영의 중심에 놓았다. 유한양행은 지금도 그의 뜻에 따라 운영되며, 수많은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삶 전체를 통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성실함, 직원의 자녀까지 돌보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윤보다 정의를 택했던 그의 선택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된다.
유일한은 말년에 한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돈이 없어 미국으로 떠났고, 가서 공부했고, 돌아와 회사를 만들었지. 그리고 지금은, 그 회사를 다시 비우고 떠나는 거야. 사람은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더 어렵단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남아 있다. 유일한, 그는 단지 의약품을 만든 기업가가 아니라, 한 시대를 품은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철학자였다. 진심을 다해 가난한 조선 소년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여정은, 오늘날 대한민국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