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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초의 정규유학생에서 임시정부 외교사령탑 그리고 월북까지.. 김규식

by 황금냥진콩 2025. 7. 22.

 

 

독립운동가 김규식 우울한 어린시절때문일까 냉소적이고 차가웠다는 그는 사색과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3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근면과 신념으로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독립을 이끌었다. 김규식님의 모습

 

 

김규식 (金奎植, 1881. 1. 29~1950.12.10)

학자·종교인·교육자,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인·학자·시인·사회운동가, 교육자, 종교인 

서양 문명과 조선의 미래를 동시에 껴안은 청년

1881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난 김규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주목받았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눈에 들어 그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조선 최초의 정규 유학생 중 한 명이 된다. 김규식은 어린 나이에 타국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근면함과 신념으로 미국 남장로교 신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에게 서양은 단순한 선진 문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을 바꿀 가능성이자, 언젠가 고국을 위해 써야 할 무기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외로운 외침

 

1919년 3·1운동 직후,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다. 이때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에서 출발해 여러 유럽국가를 거쳐 어렵게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다. 그러나 조선은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발언권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수많은 국가의 대표들 속에서 그는 단상에 올라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다. “우리는 폭력을 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의 존엄으로 말하고자 한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세계 여러 신문에 보도되며 국제사회에 조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회의에서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한 채 돌아서는 김규식의 손에는 외신 기사 몇 장이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다. 조선은 세계에 기록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 사령탑

 

귀국한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외교 부장을 맡아, 세계 각국을 향한 외교 전을 이어간다. 그는 무장투쟁과 교육운동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독립운동 세력 간의 내분을 조정하려 애썼다. 김구, 안창호, 여운형 등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중도적 입장에서 조선의 진로를 설계했다. 그는 “독립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수많은 길이 모여야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력과 외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우파와 좌파. 김규식은 갈라진 이념들 사이에서 ‘통합’이라는 이름의 독립을 추구한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

 

교육자, 사상가, 실천가의 길

 

김규식은 단지 외교관이 아니었다. 그는 늘 ‘교육’이 독립의 기초라고 믿었고, 실제로 상해 임시정부 내에서 청년 교육기관 설립에 앞장섰다.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일반 청년들도 자유와 평등, 국제정세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강의하고 자료를 번역했다. 특히 그는 영어, 불어, 중국어에 능통해 세계 문서를 한글로 직접 옮겼다. 그의 교실은 종종 지하실이나 작은 골방이었고, 칠판은 신문지였다. 그러나 그 공간은 뜨겁고 진지한 배움의 현장이었다. “한 권의 책이 총보다 멀리 날아간다.” 그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광복 후의 혼란, 그리고 또 다른 싸움

 

1945년 해방이 찾아왔지만, 김규식이 바라던 조국의 모습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좌우는 분열되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는 “광복은 절반의 기쁨일 뿐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김규식은 조국을 두 개의 이념으로 쪼개지 않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1946년, 그는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이끈다. 그들은 서울에서부터 평양까지, 그리고 미국과 소련에까지 ‘조선은 하나여야 한다’는 입장을 설득하며 분단을 막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좌우 양측 모두의 의심과 외면을 받는다. 그는 그렇게 고립되어 갔고, 결국 남북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한 채 외롭게 남았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한 마지막 편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던 시기, 김규식은 유엔 한국위원회에 긴 편지를 보낸다. 그는 편지에서 “우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분단은 강대국의 기획이며, 민중은 단 한 번도 통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라고 호소한다. 이 편지는 감동적인 문장으로 가득했지만, 결국 그 어떤 힘도 되지 못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어떤 직책도 맡지 않고 침묵을 선택한다. 누군가는 그를 ‘소극적’이라 했지만, 그는 “역사는 말보다 기억으로 남는다”라고 중얼거렸다. 그 편지는 지금도 유엔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으며, 그가 진심으로 통일을 염원했던 증거로 남아 있다.

 

월북과 최후의 침묵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측의 요청으로 평양에 초청된다. 김규식은 평화 회담을 위한 마지막 시도라 믿고 그 길에 올랐지만, 결국 남쪽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에서 머물며 침묵했다. 이 선택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월북한 뒤 정치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고, 철저히 조용히 지냈다는 점에서 그는 ‘선택의 희생자’이자 ‘양심의 죄수’로 불렸다. 그는 1950년대 후반 평양 근교에서 병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무덤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잊힌 지도자, 그러나 진정한 통합의 이름

 

김규식은 총도 없었고, 대중 선동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인간에 대한 신뢰로 조국을 이끌려했다. 그의 이름은 해방 이후 긴 세월 동안 잊혔고, 좌익도 우익도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조국은 지금 우리가 여전히 바라고 있는 모습이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단어는 ‘통일’이었다.

오늘날 그의 업적은 점점 재조명되고 있다. 외교관, 교육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통합주의자. 김규식. 그는 조국이 외면했지만, 결국 조국의 미래가 닮아가야 할 이름이었다. 침묵 속에서 끝까지 양심을 지킨 그를, 우리는 반드시 잊으면 안 된다. 

 

 

확실한건 재능 있는 인재를. 뜻이 맞지 않았다고 외면하고. 박대했다는 것이다... 누가 무슨 이유로 어떤 이권을 얻으려고 우리를 갈라놓았을까?  이렇게 맨몸으로 지키려고 했던 이를 몰랐던 것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감사하고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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