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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가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안과의사 패트리샤 바스 Patricia Era Bath

by 황금냥진콩 2025. 7. 28.

할렘가에서 태어난 미국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안과의사 
레이저를 통한 수술을 개발 특허를 냄 패트리샤 바스
패트리샤 바스

패트리샤 바스 Patricia Era Bath (1942.11.4~2019.5.30)

특허를 받은 최초의 미국여성 안과의사, 인도주의자. 안과대학원교육프로그램을 이끈 최초의 성 UCLA메디컬 센터에서 근무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센터의 명예직원으로 선출된 최초의 여성

어둠을 밝히는 시력의 혁신가

흑인 소녀의 눈에 비친 불평등

패트리샤 바스는 1942년 11월 4일, 미국 뉴욕시 할렘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루버트 바스는 트리니다드 출신으로, 최초로 뉴욕 공공 도서관 시스템에서 일한 흑인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으며, 딸의 교육에 헌신했다. 바스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고, 과학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자라던 1950~6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기로, 특히 흑인 여성으로서 의학자가 되는 길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든 사람이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이과에 몰두한다.

뉴욕에서 시작된 의학자의 길

1960년대 초, 바스는 뉴욕 헌터 칼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하워드 의과대학(Howard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에 진학했다. 그녀는 흑인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의대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으며, 수련 과정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특히 안과 분야에 관심을 가진 바스는, 빈곤층 환자들의 시력 문제에 집중하며 ‘의학은 부자만의 것이 아니다’는 소신을 지켜나갔다.

 

 눈을 감고도 보이는 것

 

바스가 레지던트 시절이던 1968년, LA의 한 클리닉에서 백내장으로 실명 위기에 처한 흑인 노인을 진료하게 되었다. 그는 병원비가 없어 수년간 방치된 상태였고, 고통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바스는 해당 병원에서 수술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자, 직접 의과대학 연구실을 설득해 수술실을 빌렸고, 동료들과 함께 의료 도구를 확보하여 그를 수술했다. 수술 후 회복한 그 노인은 “나는 내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본 것 같소”라며 울음을 터뜨렸고, 바스는 그 경험을 계기로 평생 시력 복원 기술 개발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안과의사

1973년, 패트리샤 바스는 UCLA에서 안과 교수진에 합류하며 **미국 의학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안과의사이자 안과 교수**가 된다. 그녀는 의료계의 극심한 인종·성차별 속에서도 환자 중심의 진료, 의료 격차 해소를 목표로 활동하며 많은 젊은 여성 의사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흑인 지역사회에서 예방 진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무료 안과 진료 캠페인을 주도하였다.

레이저 기술에 눈을 뜨다

1981년, 바스는 백내장 수술의 문제점을 고민하던 중, 당시 새로운 기술로 주목받던 **레이저 기술**을 안과 수술에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기존의 백내장 수술은 칼로 혼탁한 수정체를 물리적으로 제거해야 했기 때문에, 출혈이나 감염의 위험이 컸고 회복도 오래 걸렸다. 그녀는 레이저를 이용해 **정밀하게 혼탁 부위를 분해하고 흡입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전 세계적으로 쓰이게 될 획기적인 장비로 발전한다.

 

레이저로 빛을 선물한 의사

레이저페이칼의 탄생

1981년부터 연구를 이어온 패트리샤 바스는, 수년간의 개발을 거쳐 마침내 1986년 **레이저페이칼(Laserphaco Probe)**이라 불리는 장비를 완성한다. 이 장치는 백내장의 혼탁한 수정체를 고출력 레이저로 분해한 후 흡입하고, 인공 수정체를 삽입하는 혁신적인 수술 방식이었다. 1998년, 그녀는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안과 분야 첫 흑인 여성 발명가**로 등록되며, 세계 의학사에 남을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다. 레이저페이칼은 이후 미국뿐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의 안과 병원에서 널리 사용되며 수백만 명의 시력을 회복시킨 기술이 된다.

 

에티오피아의 한 환자

 

1990년대 후반, 바스는 세계보건기구(WHO)와 협력하여 개발도상국의 안과 진료를 지원하는 활동에 참여한다. 그녀는 에티오피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18년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여성 환자**를 수술하게 된다. 환자는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았고, 자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수술 후,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고, 처음 마주한 사람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딸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신인가요? 난 평생 어둠에 있었어요.” 바스는 그날 밤 조용히 혼자 울었다고 한다. 이 장면은 그녀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던 실화이며, 의료의 목적이 ‘삶을 되돌리는 일’ 임을 강하게 각인시켜 주는 사례가 되었다.

여성과 흑인의 길을 열다

패트리샤 바스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및 세계의학기술학회에서도 활동하며, 의료기술과 인권의 연결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전파했다. 그녀는 ‘Eyesight is a basic human right(시력은 인간의 기본권이다)’라는 구호를 바탕으로, 저소득층과 여성, 유색인종에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또한 **‘American Institute for the Prevention of Blindness(미국 실명예방연구소)’를 설립**, 저소득 국가에 장비와 기술을 지원하는 국제적 활동을 지속했다.

말년과 마지막 메시지

2019년 5월 30일, 패트리샤 바스는 7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는 생전에 다섯 개의 특허를 보유했으며, 의사, 발명가, 인권운동가로서의 길을 모두 걸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전 세계 의사들, 시력을 되찾은 수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이 추모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인터뷰 중 한 문장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는다. “나는 어둠을 본 사람들에게 다시 빛을 보여주었을 뿐이에요. 그 빛은 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 속에 원래 있던 겁니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무수한 부분..

패트리샤 바스는 인종의 장벽, 성별의 장벽, 그리고 의료 시스템의 불평등까지 모두 넘어서며 **한 명의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녀는 말보다 행동으로, 기술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어둠을 밝혔고, 생명을 회복시켰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 그 가능성을 받았을 수도 있다.. 우리도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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