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쿠 무사(Kanku Musa) 1312~1337
말리제국 제9대 황제
황금보다 귀한 마음을 지닌 황제
사하라에서 피어난 황금의 나라
14세기 초, 아프리카의 서쪽 대륙에는 놀라운 나라가 있었다. 사하라 사막 아래, 금이 넘쳐흐르는 땅. 그곳은 말리 제국이라 불렸고, 이 제국의 황제가 바로 만사 무사였다. '만사'는 황제란 뜻이었고, 그의 본명은 무사. 그는 1312년에 제위에 올랐으며, 그의 통치 아래 말리는 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게 된다. 말리는 세계 최대 금 생산국 중 하나였다. 사하라를 건너는 무역로에는 수많은 대상이 금과 소금을 실어 나르며 부를 창출했고, 그 중심에 만사 무사가 있었다. 그는 부를 단순히 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국 전체의 교육, 종교, 예술에 투자하며 문명을 일으킨 황제였다.
하늘 아래 가장 찬란했던 순례
1324년, 무사는 메카로 순례를 떠났다. 이슬람 신자로서의 신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계에 말리 제국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그가 이끈 순례단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로웠다. 수행단만 수만 명에 달했고, 낙타 수백 마리에 황금을 실어 사막을 건넜다. 각 낙타는 135kg 이상의 금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고, 노예들도 허리에 금 덩어리를 찬 채 걸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황금이 걷는 대지’였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무사는 궁전에서 머물며, 가난한 이들에게 금을 나눠주고, 상인들에게 베풀고, 사원 건축을 지원했다. 그는 거리를 거닐며 직접 아이들의 손에 금화를 쥐여주기도 했고, 병든 이들에게 약을 사주라고 봉투를 쥐여주었다. 그러나 이 금은 너무도 많았고, 너무도 넉넉했다. 그가 카이로에 뿌리고 간 황금은 결국 이집트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금값은 몇 년간 폭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베풀기 위해 태어난 왕이었다.
사막에서의 선택
순례길 중, 한 하인이 사막에서 실종되는 일이 발생했다. 모래폭풍 속에서 말이 놀라며 하인이 낙오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포기하라고 권했지만, 만사 무사는 말을 멈추고 직접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3일 동안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고, 20명이 넘는 병사와 하인을 보내 수색을 지시했다.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친 뒤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황제라 불리는 나도, 신의 자비 없이는 그 누구보다 나약하다. 내가 부리는 자가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이다.” 끝내 실종된 하인이 발견되었다. 그는 탈진한 채 모래 언덕 아래 쓰러져 있었고, 무사는 그를 끌어안고 오랫동안 울었다. 그는 하인을 가마에 태우고 여행 내내 직접 곁을 지켰으며, 무사히 메카까지 동행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말리 전역에 퍼졌고, 백성들은 그날 이후 무사를 단순한 황제가 아닌 **'신이 보낸 보호자'**라 불렀다. 그가 가진 금보다, 그가 가진 마음이 더 빛났기 때문이다.
지도 위에 찍힌 아프리카
무사의 순례 이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금 생산국 말리의 존재를 처음으로 지도에 그리게 된다. 1375년 카탈루냐 지도에는 황금 보따리를 들고 왕좌에 앉은 흑인 황제가 그려졌는데, 그가 바로 만사 무사였다. 이전까지 아프리카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무사의 존재는 전 세계에 이 대륙이 문명과 부를 갖춘 땅임을 각인시켰고, 이후 팀북투는 지식과 학문, 건축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무사는 황금보다 더 큰 유산을 남긴 셈이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순간, 아프리카는 세계사의 빈칸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문명을 꽃피운 후원자
팀북투에 세운 지식의 탑
메카 순례에서 돌아온 만사 무사는 제국의 미래를 금이 아닌 지식에 걸기로 했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팀북투였다. 이 도시는 사하라를 오가는 무역의 중심지였고, 수많은 상인이 머무는 요지였다. 그는 이곳을 **아프리카 문명의 수도**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혜의 등불’을 키우기 위해 아랍과 북아프리카에서 학자들을 초빙했고, 이들에게 숙소와 연구비, 원고 필사비를 지원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무사는 학자 한 명이 도착할 때마다 자신이 메카에서 가져온 **고문서를 손수 전달하며** "이 책은 우리의 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사카라 마드라사’라는 교육기관을 세우고 도서관을 병설했으며, 이곳에서 의학, 천문학, 수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팀북투의 도서관은 세계 3대 고문서 보관소 중 하나로 손꼽혔고, 10만 점 이상의 필사본이 이곳에 보존되었다. 무사는 단순한 부자가 아닌 부를 통해 지식을 퍼뜨리고, 예술과 신앙을 일으킨다 그가 귀국 후 세운 교육기관 도서관, 학자지원정핵은 그의 철학과 여정이 깊숙이 녹아있다.
빗물에 젖은 책 한 권
한 번은 심한 장마로 인해 도서관 일부에 물이 새어 들어왔고, 몇몇 고문서가 젖는 일이 벌어졌다. 무사는 즉시 도서관을 방문했고, 물에 젖은 책 한 권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손수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 한 권이, 우리가 다스리는 땅보다 더 무겁고 깊다. 글이 사라지면 나라가 흔들린다.” 이 모습을 본 시종과 학자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무사는 이 일 이후 도서관 방수 보수와 문서 보호 조치를 강화했다. 그는 부자로서가 아닌, **책을 품은 황제**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 진심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팀북투의 모스크와 도서관에 남아 있다.
마지막까지 베푸는 손
말년의 무사는 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늘 검소한 복장을 입고, 팀북투에서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후원하는 데 힘썼다. 특히 고아들이 많았던 니제르 강 인근 마을에는 **무사 기금**을 세워 매달 쌀과 교재, 옷감을 보내게 했다. 그는 자신의 장막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손수 불러주며, “이 아이가 아프리카의 별이 될 수 있다면 내 금을 모두 주고도 아깝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단순했다. “황금은 손에서 흘러야 한다. 마음에 남으면 그게 진짜 보배다.”
세계를 바꾼 한 사람
만사 무사는 단지 역사상 가장 부자였던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 부를 지식과 신앙, 건축과 사랑으로 바꿔놓은 사람이다. 그가 떠난 후에도 말리 제국은 한동안 번영했고, 팀북투는 수백 년간 서아프리카 최고의 학문 도시로 남았다. 그리고 오늘날도,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통해 **자존감과 가능성**을 배운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눈부신 부를 가졌던 황제가, 결국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진실이 오늘날까지도 감동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배울수있는점
진짜 부자는**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누는가로 증명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누군가와 따스함을 나눌 수 있는 기억이 있다면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부자가 되지 않을까?
그가 순례하며 가져간금은 지금 가치로 약 7.2조에 달했고 시중에 뿌린 금이 너무 많아 금값과 물가가 안정되기까지 12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가 카이로에서 수개월동안 소비한 금은 약 1.6조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가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의 과소비로 나라를 망하게 한 폭국이라는 묘사도 많았다고 하지만 그가 있을 때 여성이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고 외간남자와 우정을 나누고 치안휴지에 많이 힘썼기에 안심하고 사람들이 다닐 수 있었다는 내용들을 보아 이슬람종교적으로 혐오하는 보수파들의 시선이 많았던 것이지 백성을 사랑해서 본인의 것을 나누고 개개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던 무사의 정치는 틀리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